보너스: <아이실드21>, <모솔연애> 감상기
1.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문진표를 앞에 두고 지난 삶을 반성한다. 아니다. 사실 이제는 별로 반성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뻔뻔하게 문항에 답한다.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일주일에 몇 회 하십니까? 0~1회. 지난 두 달 간 마신 술의 양은 얼마나 됩니까? 주 3~4회, 그때마다 소주 1병 분량. 1분도 안 되는 문진 시간에 듣는 말은 이십대 초반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운동 하시고요, 술 줄이시고요, 금연 유지하시고요. 그런데 문득, 내년에는 좀 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이라는 것을 배워보고 싶어진 것이다.
수영, 체조, 스피드스케이트, 요가 정도가 학교가 아닌 곳에서 배워본 운동들이다. 어딘가 특정 장소로 가서 운동을 하고 온다는 게 너무 번거롭게 느껴져서 한번도 오래 해본 적이 없다. 제일 길게 배운 수영하고 스케이트는 어릴 때 엄마가 데리고 다닌 덕분에 겨우 2년을 넘겼다. 운동복, 장비, 세면용품 같은 걸 챙길 생각만 해도 귀찮아서, 정 운동이 하고 싶을 때면 차라리 냅다 집 앞 하천길을 달리거나 방에 요가매트를 펴고 요가 유튜브를 따라했다.
처음에는 요가원이나 헬스장에 가보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은 여름의 한복판이고 나는 물놀이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이. 당장 집 근처 수영장을 검색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시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이 있었다. (정말 몰 랐 어…) 수강신청은 매달 마지막 주, 기존 수강 인원이 빠지고 남은 자리만 신규 수강생에게 열린다고 했다. 후기를 좀 찾아보니 절망적이었다. 6개월 동안 시도해서 겨우 신청한 사람, 1년을 꼬박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수강신청에 성공해도 그 일주일조차 기다리기 힘들 만큼 마음이 급했다. 지금 당장 수영장에 풍덩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한 번 실패하면 한 달을 또 기다려야 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 한 이야기를 그대로 (약 2천 자 분량으로)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고 징징댔다.
멋진 친구들이 고민을 끝내주기 위해 참전했고, 무려 토요일 아침 9시에 컴퓨터 앞에 앉아 ‘수켓팅’에 ‘드갔’다. 단 한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은 다섯 명의 30대 여성… (그중 세 명은 현역으로 케이팝을 하고 있기에 굉장히 든든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결과는 멋지게 성공. 한 사람의 징징댐을 종료시키고 수영 강습에 등록 시키려면 이렇게 온 마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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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켓팅' 참전에 대한 엄마의 코멘트. 아줌마 대화 맵다 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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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료를 결제하자마자 수영복과 물안경과 수모를 주문했다. 이번주 금요일이 첫 수업 날이다. 최근 뭔가가 이렇게 기대됐던 적이 있는지 돌이켜본다. 지난주 금요일에 호프집에서 치킨과 떡볶이를 먹었는데 그때도 비슷한 수준으로 기대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기대가 잦은 편이네…
올해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도 될까? 황송하다 못해 어딘가 죄책감까지 든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걸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지금 내 삶에 아무것도 없다. 보살필 사람이나 동물, 말리고 방해하는 얄미운 가족이나 친구도 없다. 시간과 돈과 실행력과 응원해주는 사람들은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운다. 이렇게 되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삶이다.
지금까지도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산 적은 없는 것 같지만, 그건 말뚝에 묶인 코끼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스스로 난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생겨도 지금 당장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욕구뿐이었다. 메일링을 시작해야지, 내일은 와인을 마셔야지, (아무데나) 취직해야지 등등. 내가 엄청 소박하고 욕심 없고 심심한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원했다. 이제는 아니다.
한번도 안 가본 곳, 한번도 안 해본 일을 시도하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하면 해, 가면 가. 도전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매번 다른 용기가 필요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맷집이란 건 이렇게 길러지는 거였다. 이제 와서(?) 이런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에는 얼마간의 장점도 있다. 나의 천성과 맞지 않는 객기나 무모함과는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 그러고 보면 소박하고 심심한 사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모든 조건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언젠가는 건강도, 호기심과 흥미를 느낄 재주도, 시간도 돈도 떨어지고 말 것이다. 또 언젠가는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그 실패에 절망하면서 지금의 맷집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서로를 응원해주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으면!) 그러니 아끼지 말고 있을 때 흥청망청 써버려야겠다. 우리를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현재의 행복을 놓치는 건 엄청난 바보 짓일 테니까. 지루한 말이지만 현재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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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어린이 행복하길... 참고로 아줌마는 사람하고 돈이 제일 무섭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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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 넷플릭스 쇼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를 열심히 봤다. 결말은 별로 재미 없었지만 최근 1년을 통틀어 최고의 웃음(7화)을 남겼으니 좋은 기억으로 소개한다. 대부분의 연애 프로그램이 집중하는 연애 감정 보다는 개인의 성장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쇼였다. 각자의 아픔과 고통과 단점이 있지만 서로를 북돋아주고 도우면서 발전해나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우당탕탕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출연자들이 정말 대단하다. 모든 것이 서툴었던 20대 초반에 했던 연애를 전 세계 사람이 본다면? 심지어 그건 첫 연애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칠 것 같은데 새삼 출연자들의 용기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아주 예전에 친구들하고 ‘얼마 주면 <나는 솔로> 나감?’ 같은 대화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링크) <모솔연애>는… 3천만 원 주시면 나갈게요. 또 이렇게 생태계를 흐리고 만다.
물론 가끔은 “제발 그만해!!!!”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타이밍마다 패널들이 대신 비명을 질러주어서 다행히 이웃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시청할 수 있었다. 이은지 씨 카더가든 씨 고마워요. 원래는 <모솔연애>에서도 도전과 용기의 멋짐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제 본 9, 10화가 아직도 소화가 안 됐다. 하지만 8화까지는 모두 정말 멋졌어! 서툴고 솔직하고 때로는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이기적인 용기들을 오래 곱씹을 예정이다.
또 요즘은 <아이실드21>을 다시 보고 있다. 중학생 때 만화대여점에서 빌려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최근 이북으로 정발된 김에 전편 구매했다. 중학생 때 완결까지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 작가가 <원펀맨> 작가인 줄도 몰랐다. 스포츠물은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하이큐> 1권 하차가 뼈아픈 일이다.) 또 한번 즐겁게 보고 있다.
중학생 땐 그냥 좀 웃긴 스포츠물인 줄 알았다. <슬램덩크>나 <h2>, <테니스의 왕자>, 심지어는 <캡틴 츠바사>까지, 내가 본 대부분의 스포츠 만화에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상대 팀이 등장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정말 섬세하게 연출된 만화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인물이라니. 어둠의, 그리고 실존하지 않는, 오타니 같다. 흔히 오타니를 보고 비현실적이다, 만화 주인공 같다고들 하는데 <아이실드21>의 세계에서는 착하고 평범한 선배1일 것이다. 히루마 선배 옆의 오타니 선배를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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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사령탑 히루마 요이치 선배님. 고등학교 2학년이심. |
오타니 쇼헤이 선배님. 아마 고등학교 3학년이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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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 등록하고, 만화책을 실컷 보고, 소파에 누워서 천도복숭아를 먹고 있자니 정말 긴 여름방학을 보내는 중인 것 같다.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끝나지 않는 방학은 오히려 재앙일 것이다. 방학이 끝나면 또 새로운 스테이지가 눈앞에 펼쳐지길. 가끔은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인도하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즐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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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은 <아이실드21>과 <모솔연애>를 보느라 인터넷을 너무 많이 썼습니다. 집에 와이파이 설치를 안 해서 거의 2년 전부터 모든 인터넷 활동을 폰 테더링으로 연명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데이터가 똑 떨어졌고, 이 레터는 집앞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정말 좋아요. 무제한 와이파이, 빵빵한 에어컨, 책도 엄청나게 많고 마음껏 읽어도 되는데 이 모든 것이 무료라니... 공공도서관 사랑해요, 도서관 소중해요, 도서관 아껴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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