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고, 와인 네 병을 이고지고 돌아와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복병이 있었다. 언제 신청했는지도 까먹고 있던 시험이 20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올해 초 대만 여행을 갔다가 너무 좋아서 중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깝죽댔는데, 강제성이 없으니 공부가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시험을 등록했었다. HSK 3급, 왕초보도 3주면 합격할 수 있다는 시험.
급히 해커스 교재를 펼쳐보니 과연 3주 만에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조금 애매했다. 하지만 내가 못 하면 누가 하겠는가? 당장 3주짜리 계획을 짜고 공부를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후회했다. 공부야 하면 되지만 여유롭게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곁들이는 나의 작은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에… 3주이니 망정이지 4주 완성 같은 거였으면 포기했을 것이다.
6/30일에 처음 책을 펼쳤으니 이제 딱 2주째다. 다음주 토요일 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할 것 같다(이래놓고 통과 못하면 누구보다 크게 비웃어주시길). 지금부터 설렌다. 이것도 시험이라고,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이 엄청 많다. 주위에서 정말 많이 추천한 <미지의 세계>를 볼 거고,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를 볼 거고, 친구 따라 고성 여행을 갈 거다. 무엇보다 돼지갈비나 삼겹살에 쏘맥이 너무 먹고 싶다. 누가 보면 고시생인 줄 알겠지만, 이런 호들갑과 깝침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건 너무 심심한 일이다.
이렇게 엄살은 부렸지만 사실 중국어 공부를 조금 즐기고 있다. 얼렁뚱땅 벼락치기 시험이 끝나면 문법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언어를 ‘찍먹’해왔다. 한국어 영어는 찍먹이라 하기 어려우니 제외하고, 장학금 받겠다고 훈장님(?)한테 배웠던 한문, 수능 제2외국어 때문에 공부한 아랍어, 편집자로 성공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본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걸쳐 거의 3년을 배운 독일어, 영어가 너무 어려워서 도피했던 라틴어, … 이렇게 쭉 늘어놓고 보니 왜 이래? 라는 소리밖에 안 나온다. 이럴 시간에 영어 하나라도 꾸준히 공부했다면 지금 이 모양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언어는 다 필요에 의해 배운 것들이다. 정말 자발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공부하기 시작한 건 중국어가 처음이다. 처음 대만에 갔던 2018년, <상견니>를 처음 봤던 2020년을 뛰어넘어 다시 대만에 간 2025년에 드디어 시작했으니 (또) 약간 호들갑을 섞자면 7년 만에 실행에 옮긴 마음인 셈이다. 물론 중국어와 대만어는 조금 다르고, 특히 간체자가 나를 미치게 하지만… 언젠가 대만에 단기 어학연수를 갈 날을 꿈꾼다. 빠르면 40, 늦으면 50살 되기 전에는 갈 수 있겠지.
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의 마지막 스케줄. 과외다. 요즘 일종의 글쓰기 과외를 받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쓴 글 피드백을 받는 건, 일 빼면 거의 15년 만이다. 그 후로는 내 글을 누가 읽는지 생각도 안 하고 되는 대로 써서 어딘가에 올리거나 어디론가 보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독자를 고민하면서 글을 쓰고, 수정사항을 지적 받고, 고치고, 또 다시 쓰는 경험을 하니까 너무 즐겁다. 이 수업이 끝나더라도 이 기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렇게 열심히 과외 받아서 뭐 할 건지는… 언젠가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초등학생 여름방학 같은 스케줄이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초등학생 때는 방학이 되면 일단 방학숙제 각을 보고 (벼락치기에 며칠 걸릴지 계산)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떠나고 계곡에서 천도복숭아를 잔뜩 먹고 새까맣게 탄 채로 방과 후 수업을 들었다. 그때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이유는, 막연히 어른의 삶이란 책임질 것도 해낼 것도 많기 때문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이유를 지금 깨달았다. 그때는 아무리 방학숙제가 밀렸어도 시원한 쏘맥을 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게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더니 딱 그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