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는 애기였지만 지금은 다들 찌들었는데 아직도 우리한테 애기라고 해주는 사람은 각자의 할머니랑 이모밖에 없다. 이번에 다시 모인 애기들은 간도 늙어서 술은 7병밖에 못 먹었지만, 많이 팔아주자는 일념으로 배가 찢어지게 먹었는데도 9만원이 나왔다. 거기에 이모 용돈을 보태 15만 원을 계산하고 나왔는데 어디 가서 이 돈으로 이렇게 가오를 부릴까 생각하니 또 웃겼다.
이모는 참 착하고 순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다. 장사를 그렇게 오래 한 사람치고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까. 보통 교사나 교수들 중에 이런 캐릭터가 많다. 한평생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학생들만 만나면서 살다보니 묘하게 현실 감각을 잃은 사람들. 이모가 그런 사람이다. 평생을 학생 손님 - 이모 말로는 ‘애기들’ - 만 상대하다가 영원히 학생처럼 순진한 채로 남은 사람.
어쩌다 '학사 주점'을 그리워하는 교수를 데리고 녹홉에 가면 우리는 이모, 이 분 교수님이니까 바가지 씌워요! 했다. 이모는 거지 학생 손님을 제외한 모두에게 낯을 가려서 한번도 유들대며 바가지 씌우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눈물나게 답답한 일이다. 이렇게 이모가 먹여 기른 애기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사회인이 된 지 오래지만 이모는 그 애기들이 내놓는 용돈의 액수로 “돈 많이 버는 훌륭한 사람 되었”는지 “요즘도 회사가 많이 힘”든지 가늠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이모를 ‘자본주의가 (잘못) 낳은 (따뜻한) 괴물’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모의 애정의 척도는 오로지 이 놈이 녹홉에 얼마나 자주 와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로만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주 4회 이상 출석에 올 때마다 멀쩡한 안주를 한 개 이상 시킨다? 그 녀석은 이모의 사랑을 듬뿍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술 버릇이 고약하고 재수가 없는 놈이라도… 이모의 이런 따뜻한 자낳괴 면모가 빛났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상대방을 녹홉으로 데려가 이모에게 선보이고 허락(?)을 받고는 했다. 그중 가장 떨렸던 맞선은 수많은 남자친구를 지나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녹홉에 데려갔을 때였다. 그 전에 친구들한테 “야 이모 퀴어 프렌들리임?” 같은 쓰잘데기 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누구도 답은 몰랐다. 대망의 그날, 이모가 나를 꼭~ 껴안더니, “아이고~ 우리 미내가 동성 연애자가 되었냐~?” 하면서 활짝 웃었다. 여자친구가 미리 준비한 20만 원의 용돈 봉투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날 필요 이상의 축복과 칭찬과 대접을 받았다. 그날 녹홉은 서울 시내 그 어느 곳보다 퀴어 프렌들리한 술집이 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은 깨달았다. 이모는 돈 앞에서 누구보다 열린 사람이구나! 이제는 “이모 퀴어 프렌들리임?”이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돈 많이 쓰면…”
그렇다고 이모가 정말 돈에 미친 사람은 아니다. 이모는 본인의 (친)딸이 요즘 학생들 문신하는 거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 던진 한 마디에, 우리 애기들이 얼마나 이쁘고 착한지 아냐며 뚝딱 손목을 휘감는 덩굴식물 문신을 새겨버린 사람이다. 그때 이모의 나이 아마도 63세… 아무리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셔도 “정 때문에”, “애기들이 이뻐서” 장사를 그만두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녹홉 이모 김례숙 씨다.
4인 가족이 치킨 한 마리를 다 못 먹고, 반찬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남도 손맛’과 인심을 알려준 사람도 이모다. 신림동 고시촌이 사람으로 바글대고, 늘 학생 손님이 붐비고, 신입생 환영회 같은 게 있었던 때는 손님과 함께 녹홉의 식자재도 끊이지 않고 들락댔다. 매생이떡국, 홍어 삼합, 진도 홍주, 전 찌개, 또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 온갖 음식을 다 녹홉에서 처음 먹었다.
돈 없던 학생 시절 안주 하나를 시켜서 물을 부어 다시 끓이고, 거기에 밥도 볶고, 냄비 바닥이 뚫어져라 박박 긁어서 먹었다… 는 이야기는 녹홉에서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너무 부르다고 해도 빈 속에 술 마시면 속 버린다고 안주를 무한 리필해주는 이모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녹홉에 열심히 다닐 때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었다. 일주일에 3~4일을, 저녁부터 새벽까지 한 자리에 눌러 앉아 먹는 데만 썼으니 살이 안 찔 수 없었겠지. 요즘은 그렇게 먹을 시간도 소화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