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알아서 예약해둔 호텔도 엄청 호화로웠다. 101타워 뷰, 대만의 돈 많은 젊은이들이 파티룸으로 이용한다는 소문답게 객실에 잔뜩 갖춰진 술, 스파클링 워터, 와인잔, 스피커, 매일 저녁 요청하지 않아도 가져다주는 얼음까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와 엄마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쩐주 비위를 맞췄다. 이미 몸에 익어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2014년 1월, 나는 초봉 1800만 원을 주는 출판사에, 동생은 삼성에 입사했을 때부터 마음 속으로 평생 치킨은 쟤한테 얻어먹으리라 결심했으니까. 나는 최선을 다해 4박 5일 일정을 짜고, 식당들을 미리 예약하고, 구글시트로 동생한테 일정을 공유한 뒤 컨펌까지 받았다.
이번 여행은 나, 엄마, 동생 셋이서 떠난 두번째 (해외)여행이다. 우리의 첫번째 여행은 2014년 홍콩이었는데 나랑 동생이 취업한 기념으로 떠난 거였다. 반은 패키지 반은 자유 일정인 그 여행에서 나랑 동생은 뒤지게 싸웠다(^^). 엄마 앞에선 티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당연히 다 티 났을 것이다. 둘 다 20대 초반이었으니까. 예견된 살얼음판이었겠으나 돈 없는 집이라고 일찌감치라기에도 빠르게 취직한 두 딸이 여행 한번 가자는데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가이드가 가자는 대로 가고, 먹으라는 대로 먹고, 자유 일정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거나 서로를 무한히 야렸다.
과연 이번엔 어떨까? 몇 년 만에 방문하는 타이베이에 대한 기대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어떤 ‘케미’를 보여줄지가 더 궁금했다. 뼈아픈 홍콩 여행 이후 나는 집에서 나와 독립했고, 동생과는 원래도 그랬지만 더욱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내심 이제 둘 다 나이도 있고 사회생활 짬도 찼는데 설마 싸우겠나 싶기는 했다. 아니면 오히려 응 꺼져줄게 하고 한 사람이 (백 프로 내가…) 호텔을 뛰쳐나와서 다른 숙소 잡거나. 그래서 결과는? 우리는 아주 멋지게 팀플을 해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우리가 나이 든 만큼 엄마도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50대 초반이었던 엄마는 이제 60대 중반이 되었다. 우리도 이건 좀… 할 만큼 향이 강한 음식도 잘 먹고, 패키지 일행 중 누구보다 잘 걸어다녔던 엄마가 달라져 있었다. 나랑 동생은 그동안 둘 다 질리도록 여행을 다닌 뒤다. 마일리지도 엄청 쌓였다. (물론 난 비즈니스 탈 수 없다.) 어디에 꼭 가고 싶은 것도 없고 꼭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다. 게다가 이제 돈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 몰래 이 식당의 향신료 맛이 강하지는 않을지 의논하고 엄마가 조금이라도 지친 것 같으면 냅다 우버를 불러 호텔로 직행했다. 그 와중에 엄마가 자기 때문에 가려던 식당 못 가고 하려던 일정 못 한다고 생각할까봐 연기도 했다. 내가 우버를 부르면 엄마가 아니? 나 아직 더 돌아다닐 수 있는데? 라고 하고 동생이 아휴 내가 힘들어서 그래 좀 쉬자 나도 늙었어! 라고 하는 식이었다. 분명 그땐 웃겼는데 지금 쓰다보니까 조금 슬프다.
어쨌든 나는 이 여행이 팀플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거였다. 그리고 동생은 아주 적절한 조원이었다. 이보다 잘 맞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엄마 밑에서 컸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나랑 동생은 어릴 때 밖에 나가면 맨날 쌍둥이냐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닮았었는데, 크면서 점점 노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우선 동생은 키도 크고 이제 슬슬 살아온 삶이 얼굴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하고… 아무튼 다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마치고 조금씩 찍어온 영상을 편집해 만든 동영상을 친구들한테 보여주니까 반응이 다 똑같았다. 엄마랑 너랑 동생이랑 다 똑같이 생겼어…
유전자란 이렇게 무섭다. 여행에서도 느꼈다. 우리는 입맛이 비슷하고, 좋고 싫음이 비슷하고, 성격이 비슷했다. 셋 다 가오에 미쳤고 술을 좋아하고 좋을 때만 말 많이 하고 싫으면 입을 다문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처음 1분은 주위를 야리다가 그 뒤에야 신나게 뛰어간다. 그만큼 우리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제 엄마는 우리 셋 중 가장 소극적이고, 동생은 해외 출장에 질려서 호텔 조식을 좋아하지 않고, 나는 몰라볼 만큼 뻔뻔해졌다(고궁박물원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작품 설명 너무 많이 해서 모르는 한국인 아저씨가 따라다님).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가족과 4박 5일을 꽉 채워 내내 붙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언젠가 싶다. 중학생 때의 어느 여름방학 정도일까? 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떠나기 전에는 당연히 중간에 힘들고 싸울 것 같으면 적당히 각자 개인 시간 보내려고 했다. 얼마 전 갔던 도쿄 여행에서는 친구들하고 각자 다른 숙소에서 자고, 오고 가는 비행편도 다 다르고, 오전에는 알아서 개인 일정을 즐기다가 오후나 저녁 쯤에 만나서 매일 같이 놀았는데 그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그냥 매 순간을 함께 하고 말았다. 차례로 씻고 얼굴에 뭔가를 바르면서, 오늘은 날씨가 쌀쌀하다고 하니 저 옷을 입으라고 훈수를 두면서, 빨리 이거 한 입 먹어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계속 함께. 무사히, 약간은 낯선 서로와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다음 여행은 언제가 될까? 엄마 말마따나 그땐 막내도 노인일 수도 있다. 그것 나름대로 재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