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는 도시에게 냅다 사랑 고백
궁금하다,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만을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길을 걸으면서 보이는 모든 게 궁금했다. 왜 우체통이 초록 빨강 두 개 나란히 있을까? 왜 지하철역 이름에 다 충효(忠孝)가 붙어 있을까? 왜 학생들이 버스에서 스마트폰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 조용하지? 이런 걸 하도 물어봐서 동생이 자기 아는 대만 언니를 소개 시켜준다고 했다. 적어 놨다가 그 언니한테 한번에 물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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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대만에서 사는 한국 아저씨들을 네이버 블로그 이웃으로 엄청 추가했다. 공자의 가르침 중 ‘인,애,충,효,신,의,화,평’라는 여덟 가지 덕을 둘씩 나누어서 타이베이 시내 대로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 중정은 장제스의 자라는 것(!). 우체통이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해외우편 하나는 국내우편용이라는 것 등을 그 블로그들을 통해 알았다.
학생들이 조용한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유교의 가르침이 그들의 전통 속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곳이야말로 진짜 선비의 나라인 게 아닐까? 역시 라이관린의 나라는 다르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할 뿐이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년 라이관린의 곧고 바른 품성과 정신이 이곳에서는 평범함이었던 것이다. 진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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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참 친절하고, 조용하고, 그런데 쿨하고, 지독하지 않고, 동시에 절도 있고, 여유로운데, 하지만 성실하고, …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지만 이쯤 되면 진짜 대만 사람 중에 안 친절한 사람 찾기 챌린지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마냥 바보처럼 착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정신’이 있어 보인다. (’보인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정말 짧은 시간 동안 보기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2025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신이.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만은 연도도 민국기년을 쓴다. 쑨원이 중화민국을 세운 해를 기준으로 해서 서기 2025년인 올해는 민국 114년이다. 이렇게 말해서 죄송하지만 가오 미쳤다. (우리나라도 아주 예전에 단기 몇 년, 으로 쓰는 게 소소하게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거 아는 분은 건강검진 꼭 받기.) 물론 문화혁명을 피해갔다는 단순한 이유 말고 수많은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 있겠지만 나는 모른다. 바보같이 그저 ‘가오 미쳤다’라고 할 밖에…
아주머니들은 공원에 모여 루미큐브를 하고 - 마작인 줄 알고 슬쩍 다가가서 구경했는데 루미큐브 - 또 한 켠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모여 태극권을 한다. 버스 정류장 의자 밑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서 순서대로 앉아 있다가 순서대로 타면 된다.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골목에서 수다를 떤다고 한다. (희연 선배가 알려줌) 해외 선진국(?)에 처음 가보고 모든 것에 놀라서 팔짝 뛰는 옛날 사람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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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도 맛있다. 대만 여행을 간다고 하면 대부분 ‘대만에 맛있는 거 많잖아요’라고 하는데 정작 그 ‘맛있는 거’로 손꼽히는 메뉴들은 별로 안 먹기는 했다. 물론 딤섬하고 훠궈는 먹었지만. 내가 생각한 대만의 맛은 슴슴함, 공허함이다. 뭘 먹어도 식재료 자체에서 약간 공허한 맛이 난다. 맛이라기 보다는 질감에 가깝겠다. 공심채를 씹을 때 같은 공허함.
이번에 먹었던 음식들 중 제일 맛있었던 건 ‘롄우’라는 과일이다. (뭔 과일이 제일 맛있냐고 길길이 날뛸 친구의 얼굴이 눈에 선하네^^) 연꽃 연, 안개 우. 이름부터 공허하다. 정말 안개처럼, 스폰지처럼 파스스 사라지는 맛이다. 맛도 나대지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무한히 먹을 수 있을 것처럼…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는다고 하니 슬픈 일이다. 석가도 정말 맛있었고 차도 맛있었다. 울고 싶다. 대만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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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술도 잘 안 먹더라...
(우리는 열심히 먹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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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에서는 사람도 풍경도 과일도 소음도 나대지 않는다. 얼마나 꿈에 그려왔던 곳인지. 모든 것이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 식당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길에서도 내 목소리가 너무 크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곳. 번화가를 걸어도 상점에서 틀어 놓은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지 않는 곳. 버스에서도 라디오를 켜지 않는 곳. 화려하고 눈이 멀 것 같은 전광판은 적고 대신 아주 큼직하고 명확하게 글자만 박힌 간판이 많은 곳.
날씨도 너무 좋다. 물론 7월에 한 번, 2월에 한 번 가본 게 다라서(네 맞아요 딱 두 번 가보고 이러고 있어요) 진짜 최악의 날씨는 경험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습하고 태풍이 오고 덥고 추워도 좋다. 더워봤자 서울보다 안 덥고 추워봤자 서울보다 안 추울 것이다. 눈앞에 필터가 낀 것처럼 흐린 날이 대부분인데 그냥 그조차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무턱대고 좋다고 하는 무지성 빠에 가깝다. 그러면 어떤가? 점점 좋은 건 줄어들고 싫은 것만 늘어나는데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생겨서 행복하다.
대만의 전통은 무엇인지, 대만의 젊은이들은 어떤 정치 성향을 갖고 사는지, 길에 잔뜩인 저 나무는 이름이 뭔지,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들어올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통이라는 것이 관광객의 환상이라면 ‘진짜’는 무엇인지, 저 촌스럽고 꼿꼿한 건축물들은 대체 뭔지, 그냥 모든 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오늘 <왕초보 중국어 기초> 1강을 들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지만…) 40분짜리 하나 듣고 온 동네방네 소문 다 냈다. 이제 이걸 언제 포기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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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보다 어떤 ‘정신’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은 대만 국부기념관. 물론 의미는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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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사랑도 식는 걸까? 그보다는 사람이든 도시든 너무 속속들이 알고 나면 이젠 그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눈을 가리는 것에 가까울 테다. 우리는 흔히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다 똑같다’고 말하곤 한다. 대만이라고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슬쩍 속는 존재. 역시 너도 똑같았구나, 라고 읊조리게 되기 전의 짜릿한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시킬 때다. 그러니까, 그 순간들의 연속이 인생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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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 아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
이제부터 계속 행복할 거야. 이건 시작이고 더 큰 행복이 올 거야!’
다 헛된 기대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이 행복했고.
바로 그 순간이… 전부였던 거야.”
- <디 아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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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진 많이 넣은 적이 없는 것 같죠.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서, 여기에서 줄이고 후다닥 보냅니다. <미키17>하고 <퇴마록> 본 이야기는 주말에 <콘클라베>까지 본 뒤에 묶어서 할게요. 금요일을 잘 건너 주말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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