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말이 웃겨서 써봤지만 사실 내 인생 그닥 쓰지 않다. 다만 인생이 쓰면 술이 덜 쓰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실제로 술은 쓴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 이다.) 대체로 달달한 인생에서 그나마 쌉쌀한 부분을 찾아보자면 부친의 존재다. 애비 없이 태어나는 자식은 없으니 우리 모두는 부친의 존재를 느끼며 산다. 하지만 나에게 부친의 존재는 매우 찝찝한 무엇이다. 있긴 있는데 투명하고 투명하지만 팽팽하다. 진짜 질 좋은 주방용 랩 같다. 내 인생 랩으로 둘둘 말린 짜장면 그릇 속 짜장처럼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랩의 벽에 부딪치기만 한다고 느꼈던 적도 있다. 투명하고 질긴 랩…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무젓가락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어대다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가운데를 뽁 찔러 북 찢고 짜장면 비볐다.
살면서 재수 없는 아저씨, 무서운 아저씨, 더러운 아저씨, 아무튼 수많은 아저씨들을 많이 만나왔다. 사실 세상엔 아저씨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수많은 아저씨를 만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그 아저씨의 숫자만큼 들었던 질문이 있다. “##님(보통 사장님, 팀장님 등으로 불리는 아저씨) 무섭지 않아요?” 네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아저씨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겁먹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다 부친 덕분이다.
나는 부친 전화번호를 모른다. 저장도 안 돼 있다. 어쩌다 엄마 집에 가면 얼굴을 마주치긴 하는데 서로 아무 말도 안 한다. (엄마: 둘이 성질머리 똑같애가지고) 22살 땐가 23살 때 “부: 너 이렇게 살 거면 인연 끊자” “나: 어~!” 라고 한 이후 쭉 이어진 상황이다. 둘 다 성질머리 대박이긴 하다. 어떤 폭발적인 싸움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고, 아주 예전부터 쌓아오던 서로를 향한 실망과 한심함과 분노와 짜증과 어쩌고가 이 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 긴 이야기를 1980년부터 시작하긴 어려울 것 같고, 오로지 내 중심으로 시작해보자. 5살 때의 일이다. 어린이용 역사 만화책을 읽고 아빠(당시엔 ‘아빠’였음)한테 책 이야기를 실컷 하다 이런 말이 나왔다. “이게 삼국시대 유물인데, 난 신라 유물이 제일 예뻐!” 그리고 바로 미치도록 혼이 났다. 사유는 ‘신라는 우리 민족을 외세에 팔아먹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진짜다. 지금 쓰면서도 너무 웃겨서 히죽거리고 있다.
부친은 민족해방의 염원을 담아 북한의 유명한 사회주의 소설 제목을 따서 첫 딸의 이름을 지을 때부터, 그리고 이놈이 좀 똘똘한 것 같다는 걸 느낀 이후 쭉, 나를 통일전사로 키우고자 했다. 그런데 미래의 통일전사 입에서 감히 ‘신라 유물이 제일 예뻐’라니 이것은 안 될 말. 정신교육을 똑바로 시켜야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닌 부녀갈등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작되긴 했으나 솔직히 초등학교 때까지는 시작된 줄도 몰랐다. 개량한복을 입고 등교해도 아무렇지 않았고(귀여웠으니까), 방과 후 수업에서 3년 동안 단소를 배우면서 국악중학교 입학을 권유 받았으나 ‘경쟁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몰랐고(그땐 몰랐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차피 ‘이북’의 예술 수준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는 이유였다. 또 웃겨서 미칠 것 같음), 한겨레에서 주관하는 ‘어깨동무’ 같은 캠프에 보내져도 학교 빠져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는데, 고분고분 통일전사로 자라던 딸이 갑자기 미제에 물들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야마가 돌았을지 부친의 마음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청바지 사달라고 했다가 ‘미제의 앞잡이’ ‘자본주의 돼지들이 입는 옷’ ‘이 순간에도 굶고 있는 이북 동포들’ 로 시작하는 끝도 없는 설교를 당했으며, ‘머리를 물들이고 몸에 구멍을 뚫은 얼빠진 딴따라들’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은 금지였으며(나랑 동생은 몰래 가요 프로그램을 보다가 걸렸는데 그 날 바로 TV 전선이 잘렸다. 엄마: 난 무슨 죄임?), 당시 유행했던 귀찌를 했다가 귀를 뚫은 줄 알고 당장에 집안이 뒤집어졌으며… 반항심이 생겼던 건 이때부터였다. 맞기 전에 이거 귀찌라고 말했으면 됐을 텐데 난리를 치는 것을 보니 짜증이 나서 끝까지 ‘귀찌 고백’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열받게도 풍물 동아리 활동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리고 이명박 정권 덕분에(?) 집회에서 부녀 상봉을 너무 자주 한 나머지 다소 소강 상태로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갔다.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 저 이유였다. 민족의 얼과 정권에 대한 저항 정신을 지닌 예비 통일전사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진짜 이 웃음 그치는 법 좀 알려줘요) 심지어 고등학교 때 닥치는 대로 읽었던 독서 목록 안에는 우리집 큰 책꽂이 4개를 꽉 채운 각종 표지 없는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철서신>이나 <참된 봄을 부르며>, 나의 이름이 되어 버린 <민중의 바다> 같은 책들.
고등학교 때의 싸움은 딱 한 번 있었다. 반장이 되었을 때인가? 엄마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반에 햄버거라도 돌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부친한테 카드를 달라고 했는데, 그때 애비(너무 화가 나서 애비라고 안 할 수가 없네)가 엄마한테 아주 모욕적인 말을 했다. ‘자본주의의 돼지’ 비슷한 건데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릴 만큼 화가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는데 그런 일도 또 잊힌다는 게 신기하다. 그때 생각했다. 남한 사회에도(ㅠㅠ) 가족보다 이념이 중요한 사람이 있고 그게 내 부친이구나. 엄마는 왜 이혼을 안 할까.
나름 평화로운 3년이 지나 수능도 쳤고 논술도 면접도 다 봤고 합격도 했고 입학만 하면 되는데 이때 부친이 폭탄 발언을 했다. 너 서울대 가지 마. 사유1: 니가 가고자 하는 과는 미제의 앞잡이 학문을 하는 곳이다. 사유2: 내가 지금까지 보니 너는 인문학적 사유가 부족하고 따라서 평생 학문을 할 사람이 아닌데, 니가 그 학교에 가면 학문의 길을 걸을 한 사람의 자리를 뺏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말을 무시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어차피 부모가 등록금 한 푼도 안 내줄 건데 내가 왜 등록금 더 비싼 학교에 가야 해? 이때의 결정이 싸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의 이득과 출세(?)보다 대의가 중요한 사람이 있고, 그게 내 부친이구나. 인생 고달파지겠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뒤 본격적인 파국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