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덕질은 고3이 되고 대학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런데 강의실에서 졸음을 참던 어느 날 문자가 미친듯이 쏟아졌다. 졸음도 쏟아지고 문자도 쏟아지고. 급기야 엄마한테는 전화가 오기 시작해서 강의실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는데 다짜고짜 “너 뉴스 봤어?”. 맞아요, 그 날은 서태지의 이혼 뉴스가 한국을 강타한 날이었답니다. 결혼이 아니라 이혼 뉴스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지만 이미 내 덕질은 멈춰 있었기에 큰 충격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건 따로 있었다. 연락 안 한 지 오래인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심각한 팬질 - 당시에는 ‘덕질’이라는 말이 없었으므로 - 을 하는 친구였다. ‘너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간다고 빠져나가서 전화로 콘서트 티켓 예매했잖아’ ‘너 중간고사 기간에 뮤비 출연해야 된다고 파주 갔잖아’ ‘너 무슨 법 폐지하라고 여의도에 집회하러 갔잖아 오빠 지켜준다고’(방송재심의 하라는 거였다)… 미친 거 아니야? 정작 내가 기억하는 건 어디선가 새 앨범의 피아노 악보를 구해 쳐보겠다고 애쓰던 주말, 그때 연희동*에서 만났던 언니들이 내가 중딩이란 걸 알고 난처해 하다가 사줬던 만두국의 맛 같은 것들인데.
*연희동에는 서태지 집과 전두환 집이 있었다. <응답하라 1994>를 참고하시길…
이렇게 어떤 추억은 나한테 없다.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대신 보관해준다. 도서관에 가면 엄청 많은, 나한테 없는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친구들을 만나면 나한테 없는 추억을 줄줄 알려준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너 그때 치마 올려입고 라이징썬 춘 거 생각나? 하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다. 덕질을 한다는 건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열렬히 좋아한다는 뜻도 되지만 내가 기억 못 할 나의 추억을 대신 기억해줄 누군가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어떤 덕질은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둘러싼, 변죽만 울리는 기억들로 남는다. 2017년부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그룹을 좋아했는데도 그 그룹의 노래나 활동이 잘 기억 안 난다. 물론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면 기억 나겠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대신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그룹의 멤버 중 한 명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널이 한 웃긴 리액션을 기가 막히게 따라한 친구의 모습, 그때 그 술집에서 우리가 앉았던 자리. 연말 시상식 행사에 들어가기 전 오늘 맨 정신으로는 못 본다며 나눠 마신 소주 1병, 시상식이 끝나고 나와 컴컴한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술 안 마셨으면 어쩔 뻔했냐고 스스로의 멱살을 쥐어뜯던 기억. 앨범 발매일에 서점 외근을 잡아준 직장 사수가 포토카드 교환까지 도와줘서 황송함에 몸둘 바를 몰랐던, 하지만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낄낄댔던 광화문 교보문고 맨바닥…
이 모든 순간은 함께 한 친구들이 있어서 아직도 생생한 거다. 혼자 했다면 그냥 까먹고 치웠을 텐데 친구들하고 같이 하면 서로 끊임없이 ‘추억팔이’를 하면서 서로의 기억에 빈 부분을 끼워 맞추고 영원히 복습할 수 있다. 이제 그 그룹은 갔고(간 지 오래됐고) 멤버들은 뿔뿔이(대체로는 군대로) 흩어졌고 친구들은 2D 세계로 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친구다. 각자의 부모는 이 친구들을 맘대로 부른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인터넷 친구들’ 혹은 ‘오타쿠 친구들’ 그리고 가끔은 ‘등산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니 덕질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앞서 한 말을 바꿔야겠다. 놀이를 제외한 모든 행위는 변죽을, 혹은 변죽만을 남긴다… 솔직히 5년 전에 했던 프로젝트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었고 기억에 남는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싸이코패스거나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 병에 걸린 녀석이겠지. 우리 대부분은 닥쳐온 현재에는 과녁의 정가운데를 향해 몸을 던지지만, 결국 뒤를 돌아보면 그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가는 파문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파문은 너무 아름다워서 영원히 곱씹게 되는 무엇이다. 내가 겨냥했던 <부메랑>이니 <켜줘> 같은 과녁은… 질끈 눈 감을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