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여러 차례 사랑과 이별과 관계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들에 처맞은 지금은 나의 방식이 무엇인지 안다. 어떤 마음이 끝났을 때, 나는 반성과 참회와 수행의 마음으로 감정과 관계를 종료한다. 그러니까 반드시 어떤 의례를 거친다는 뜻이다. 모든 슬픔과 마지막에는 의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일들에는 성급한 의례 대신 끈질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그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 (이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있을지, 그 벌을 언제 받게 될지가 내 삶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뭔가를 ‘그냥 두기’, 그리고 나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두고 보기는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저걸 잘하는 사람들을 회피형(때로는 회피충)이라고 부르던데 그들이 아주 신기한 존재로 느껴진다. 회피라는 건 뭘까? 영원한 지연일까? 아니면 망각의 첫 단계일까? 뭔가를 회피했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영원히 회피할 수 없는 흉터로 변하고 말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내가 회피한 무언가가 영원히 그곳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기가 가능하다고? 회피 전문가 계시다면 저에게 한 수 가르쳐주시길…
또 한 가지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인생 대부분의 일들이 갠플이 아닌 팀플이라는 점이다. 운이 좋게도 나의 어린 시절에는 팀플이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내 선에서 여러 명의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가족 단위, 사회 단위로 해결하지 않으면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뜻이다. 친구 관계도 대체로 내 맘대로 되었다(다시 한 번 반성의 시간).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나를 좋아했고, 내가 아무 생각 없어도 대부분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지평이 넓어지고 모든 가능성이 수만 가지로 뻗어나가자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 어쩌면 이토록 다종다양 아롱이다롱이 형형색색이라 서로를 미치게 할까. 나는 늘 최선을 다해 내가 저지른 마음과 일들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럴수록 책임지지 못할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졌다. 특히 그게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종류의 일이라면. 게다가 나와 인생의 책임을 다른 무게로 느끼는 사람과의 팀플이라면. 얼마간은 슬쩍 눈을 감고 당장의 행복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죄도 아니고 양심에 거리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빡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로 태어났으니 나 자신이 감당할 수밖에.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아무도 안 시켰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람도 또 없을 것이다. 심연을 너무 들여다보면 결국 심연도 나를…
어쨌든 이런저런 시기를 다 지나 이제는 친구에게 뇌에 힘 좀 풀으라는 조언을 듣는 30대다. 덕분에 층고가 높고 넓고 밝은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울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십 대 시절의 내가 봤다면 저게 나일 리 없다며 1초 만에 무시해버렸겠지… 하지만 그 재수 없는 애도 결국엔 이게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말 거라는 걸 안다. 걔의 마음 속에도 나랑 똑같은 책임감이 들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이게 본인의 마음에 책임지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날 콤파스를 안 가져갔다면 손바닥 한 대 맞고 끝났겠지만 나는 그걸 선택하지 않았고. 그런 선택들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 날들이 흉터로 남아 영원히 나를 지켜봤을 거라는 걸. 물론 인생은 길고 흉터 몇 개 있다고 그게 실패한 인생일 리 없다. 단지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책임을 지고 싶다. 졸음을 참아가며 몽당연필의 꽁지를 깎아낼 때의 마음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