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귀여운 속담 아닌가. 평생소원이 누룽지. ‘기껏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하찮은 것’이라는 뜻의 속담이라고 한다. 참고로 ‘평생소원’은 한 단어다. 누구에게나 평생소원 하나쯤은 있다는 뜻일까? 그럴 리 없는데. 아무튼 이번 추석 유난히 크고 밝고 둥근 달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럴 때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데, 나의 소원은 무엇인가. 소원이라는 말의 무게치고 살면서 소원을 빌 기회는 꽤 자주 찾아오는 편이다. 생일에 케이크에 꽂은 초를 불면서 소원을 빌고, 추석에 크고 둥근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새해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빌고, 종교가 있다면 각종 기도 시간에 또 빌 것이다. 초딩 때는 황금 마티즈가 지나가기만 해도 소원을 빌지 않았었나? 싶어 동생한테 물어보니 그거 아니고 그냥 옆 사람을 퍽 때리는 거였다고 한다. 미안. 아무튼 대충 세어봐도 일 년에 넉넉히 서너 번은 소원을 빌 기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대충 뭔가를 생각하는 척하고 넘어간다. 해맑게 ‘소원 빌어~!’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앞에서 난 그런 거 없는데.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서 그치면 좋겠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꼭 소원에 대해 곱씹게 된다. 진짜 소원이 없나? 누룽지라도 빌면 되잖아. 차라리 누룽지가 나을 만큼, 나의 소원은 미치도록 작거나 급기야? 싶게 크다. 세계 평화, 차별 철폐 정도는 되어야 소원이라고 빌어볼 만한거 아닌가 싶다가도 우리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주세요 정도면 큰 건지 작은 건지도 모르겠다. 뭘로 하든 혼란하다.
추석이 며칠만 늦었어도 휘영청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이런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강화통통생고기에서 고기 먹게 해주세요.’ 요즘 가장 바라는 일이 저거다. 날이 조금 선선해지면서 퇴근을 걸어서 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진짜 저 식당 너무 들어가고 싶다. 혼자서도 먹으려면 먹을 수 있고 굳이 친구를 불러서 먹어도 되지만 그렇게 각 잡고 먹는 거 말고 그냥 가볍게 오늘 고기 먹을까? 하고 들어가서 소주 한 병 딱 까고 싶다는 이야기다. 누룽지보다 못한 소원인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간절했는지 며칠 전 꿈에도 나왔다. 몬스타엑스 셔누 씨와 이영지 씨가 꿈에 나와서 같이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 정도면 크든 작든 소원이기는 한 듯.
나의 강화통통생고기 소원 정도면 이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 이루어지면 안 되는 소원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를 보며 (마음 속으로) 무릎을 쳤다. 내 말이 저 말이야. 사람들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안 된다니까? 많은 경우 누군가의 소원은 다른 누군가를 침해한다. 그리스로마신화만 봐도 수두룩하게 나오지 않나. 난 저 사람이 너무너무 좋아~! 하지만 상대방은 그를 너무너무 싫어~! 한 나머지 차라리 식물이 되고야 마는 이야기들이.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사람의 자유의지는 원래 어쩔 수 없다는 조건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40만 명이 동시에 복권에 당첨되고 내가 당겨놓은 달이 일본에 쓰나미를 일으키는 일들이 벌어진다.
꼭 신화나 영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게 내 소원이어도, 당신의 소원이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을 지니고 그래서 너도 나도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은 존재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아야 한다. 내 생각엔 이 사실을 빠르게 깨달을수록 이후의 인생 난이도가 조금 낮아지는 것 같다. 살면서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고, 그래야 하는 당위 역시 어디에도 없다는 것.
뜬금없지만 가정이라는 것을 만들기 싫은 이유 중 하나도 이거다. 사람들은 혼자일 때보다 가족이 생겼을 때 더 당당하게 탐욕스러워진다. 개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시스템도 그걸 조장한다. 아무래도 정상가족이 많아야,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더 ‘잘살게’ 되어야 시스템이 유지될 테니까. 어쨌든 나는 그런 인간이 되기 싫고, 빌어야 되는 소원이 많아지는 것이 싫다. 지키고 싶은 것이 늘어난다, 잃을 것이 많아진다는 말들은 사실 본인의 욕망을 본인의 욕망이 아닌 척 추구하기 위한 변명인 건 아니냐고 묻고 싶다. (누구에게?)
강화통통 소원은 된다고 하고 다른 건 다 변명이라고 하니까 너무 치사하게 느껴진다. 치사하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럼 일단 강화통통도 소원 리스트에서 지우겠다. 나에게 소원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원하고, 이루어내는 리스트라기 보다 이렇게 하나씩 지우고 없애고 포기해버리는 리스트에 가깝다. 이를 테면 한동안은 당시 미워하던 누군가의 이름을 넣어 ‘누구누구 뒤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메모하며 떠올린 누구를, 이 문장을 적은 지 두 시간 뒤에 마주치고 말았다. 거의 7년 만에… 이런 일을 겪고 나면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진짜 너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 소원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도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그를 마음 속으로 용서했다. (진짜로^^)
물론 소원이 없다는 건 소원을 빌 만큼 고통스럽고 절실했던 적이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배부른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건 그 사람이 그만큼 행복하고 살 만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누룽지를 소원으로 비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쓰다보니 평생소원을 뭘로 해야 할지 알겠다. 평생을 평생소원이 누룽지인 사람으로 살기. 이 정도면 여느 소원들처럼 적당히 어이없고, 건방지고, 깜찍한 소원인 것 같다. 꼭 이루어질 필요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는 점까지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