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할머니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렵다’며 한복을 입지 않습니다. 자꾸 사촌동생이 안 입는 추리닝이나 패딩 같은 걸 입으시는데요. 저와 제 동생은 이 상황을 이해도 용납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새 옷을 배송 시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한복집에서 일할 때 얼마나 고운 옷감을 좋아했는지 다 봤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꽃을 선물하면 색이 어쩜 이렇게 곱냐면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감탄하는 모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할머니가 어쩔 수 없이 못생긴 옷을 입는다? 안 될 말이죠. 철마다 때마다 할머니 집으로 배송되는 각종 꽃과 옷과 과일과 신묘한 물건들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의 멋짐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아직도 생생한 또 하나의 멋진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어쩌다 그랬는지, 한번은 할머니와 함께 인도 음식점에 갔어요. 제법 어쎈틱한 맛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었는데 어쩌자고 그런 도전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음식이 할머니 입맛에 맞았고, 할머니는 음식 하나하나에 도전하며 맛 분석과 평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방에서 자꾸만 홀을 힐끔거리던 인도인 요리사와 눈이 마주쳤고, 할머니가 주방을 향해 박수를 짝짝 보냈고, 결국 요리사는 주방에서 홀로 나와서 머쓱하게 칭찬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 우리 할머니지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유튜브를 시작했다면 박막례 할머니 같은 스타가 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할머니는 말이 미친 듯이 빨랐다가 엄청나게 느려지는 특이한 화법을 구사하고, 그 유머를 이해하고 웃으려면 최소 10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빠르다는 건 거의 랩 수준으로 빠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할머니가 좋아하는 소재, 그러니까 손주들 칭찬이나 어떤 음식의 요리법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말이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5년 전 외삼촌과 결혼한 외숙모는 아직도 할머니의 랩핑을 잘 못 알아들으시더라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말이 느리다는 건 말과 말 사이에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날 만큼 느리다는 뜻입니다. 설날에 물어봤던 이야기를 추석에 대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절하게 웃긴데 말로 설명이 안 돼서 슬프네요. 이쯤 되면 ‘혹시 할머니 충청도 분이셔?’ 라는 합리적인 추론에 따른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할머니는 강원도 사람…
제가 태어나기 전 할머니의 인생이 어땠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서 ‘연이’라고 불렸다는 것, 그런데 출생신고는 ‘OO용’으로 되어서 속상하다는 것, 어릴 때 배운 일본말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메끼리’나 ‘다마네기’ ‘소제’ 같은 단어는 가끔 쓴다는 것 정도가 띄엄띄엄 들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중학생일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할머니는 혼자 사남매를 키우느라 그야말로 등골 빠지게 일했겠죠. 중학생이었던 엄마가 저를 낳기까지 십 년이 걸렸으니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요?
그 뒤로 할머니는 저의 기억 속에서 그냥 할머니입니다. 미취학 아동 시절, 엄마가 회사에 가면 저랑 동생은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던 띵동 소리가 나면 인터폰을 통해 활짝 웃는 할머니 얼굴이 보였거든요. 우리가 있는 힘껏 “누구세요~~~!” 하면 꼭 ‘머리 하얀 할무니예요’ 하던 목소리도요.
할머니가 없는 평일 저녁엔 밥솥에서 밥을 푸고 밑반찬을 꺼내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있는 날엔 온갖 맛있는 냄새가 집 전체를 꽉 채웠습니다. 아침에 깨면 생선 굽는 냄새가 났고, 아침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할머니가 물에 만 밥 위에 조기를 발라 얹어주면 저도 모르게 반 공기를 뚝딱 하게 됐어요.
밀가루 묻혀 지진 조기는 아직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입니다. 이제 온갖 걸 다 먹어본 손녀의 입맛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져졌지만, 그래서 어딜 가면 역시 생선은 금태니 병어니 잘난척을 하지만, 어디선가 밀가루 묻혀 지진 조기가 밑반찬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다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에 새겨진 맛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먹는 얘기를 또 한참 해버렸네요. 할머니는 모든 요리를 맛있게 잘 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의 저를 먹이지 않았다면 지금 키보다 10cm는 더 작았을 겁니다. 또 할머니는 저에게 온갖 놀이를 가르쳐줬어요. 다리를 겹치고 마주 앉아서 “내 다리 네 다리”하던 놀이, “아침바람 찬바람에”로 시작하는 쎄쎄쎄, 실뜨기, 공기놀이, 비석치기, 땅따먹기는 다 할머니한테 배웠고요. 옛날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조금 커서는 아무리 전래동화 전집을 읽어도 새로운 ‘콘텐쓰’가 없다며 혀를 차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이거 다 할머니가 해준 얘긴데, 좀 새로운 거 없냐? (아무래도 전래동화라서 새로운 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