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저희가 뿌갠(…) 대걸레 자루는 할머니와 친했던 어떤 계장님이 처리해주었습니다. 덩치 좋은 아저씨였는데 밥 다 끝난 오후 3-4시쯤 슬쩍 구내식당에 올라와서는 “어머니 라면 한 개만 끓여주실 수 있나요?”를 자주 하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일하다 출출할 시간에 몰래 먹는 라면의 맛… 대걸레 30개는 사주고도 남았겠습니다.
주방 청소까지 다 마치고 나면 할머니의 퇴근 시간입니다. 할머니 집이 있는 골목에는 멀끔한 주택도 몇 개는 있었지만, 그 길에 제일 많은 건 가내 공장이었습니다. 양말 공장, 고무줄 공장, 고무장갑 공장이라고 부르던 그곳들은 더 정확히 말하면 제품을 포장하는 작업장이었어요. 할머니는 골목에 있는 양말 작업장에서도 일했습니다. 공장에서 나온 양말들은 왜인지 모르게 다 뒤집어져 있는데, 뒤집어진 양말들을 마네킹 발 같이 생긴 플라스틱 거치대에 쑥 끼워서 다시 뒤집어주고 100족씩 포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거기서 일하는 게 싫었는데, 그 작업장에서는 간식도 못 얻어먹고 자리 깔고 숙제도 못 하고 그냥 가만히 먼지 구경하면서 앉아 있기만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 공장들하고 구분 안 되던 할머니 집은 옛날 방앗간 같은 데 딸린 가겟방을 대충 수리해놓은 꼴이었습니다. 진짜 옛날 샷시 미닫이문에 자물쇠 하나 걸어둔, 양 손을 샷시에 끼우고 온 몸으로 드르륵 끼익 밀고 들어가면 바로 시멘트 바닥이 나오는 곳. 현관 겸 시멘트 복도를 지나야 부엌이 나오는 곳, 거길 지나야 생활 공간이 나오는 곳이 할머니 집이었어요. 생활 공간과 분리된 시멘트 바닥 쪽 한 켠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지만? 함정은 물을 내리는 장치가 없어서 옆에 있는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부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열악한데, 그땐 또 그런 생각을 못했네요. 왜냐면 그 시간은 여름방학 모험 중 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풍기 하나가 다인 집안은 덥고 답답해서, 외할머니와 우리는 자주 집 밖 골목길로 나갔습니다. 골목길이라도 차 두 대는 넉넉히 다닐 폭이었는데요. 그 한 켠에 돗자리를 깔고 냅다 엎드려 또 방학숙제를 했어요. 지금 제가 아는 한자는 다 그때 길바닥에 배 깔고 외운 것들입니다.
할머니가 일을 안 하는 날에는 횡단보도 큰길 건너 뒷산에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아카시아 꽃 따먹는 법도 배우고, 풀피리 부는 법도 배우고, 돗자리 펴고 또 숙제를 했네요… 이 정도면 숙제에 미친 아이인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 이야기 중이었지만 여기서는 살짝 겨울방학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겨울엔 할머니가 어디선가 비료포대 같은 걸 구해와서, 눈 쌓인 뒷산 언덕에서 질릴 때까지 썰매를 탔거든요.
그리고 할머니의 창동 집에는 왠지 케이블 방송이 나왔습니다. 집에서는 맨날 공중파만 보다가 방학 때만 볼 수 있는 케이블 방송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릅니다. 엠넷에서는 ‘신비’라는 가수의 <Darling> 뮤직비디오를 너무 많이 틀어줘서 게임 애니메이션을 다 외울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계속 봄) 제가 진짜 좋아한 건 당연히 투니버스였는데요. 밤마다 심슨을 보느라 졸음을 참고 참고 또 참곤 했습니다. 또 할머니랑 같이 보는 전원일기, 전설의 고향, 용의 눈물은 왜 이렇게 재밌었을까요?
이렇게 한참을 쓰고 보니 직장인에게는 여름방학이 없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이제 제 몸뚱이는 휴식을 원하지만 정신은 더 이상 어리지 못해서, 지금의 저라면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했던 저 여름방학을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다며 슬퍼할 게 분명하니까요. 지금 방학 같은 걸 줘봤자 술 실컷 먹고 숙취에나 시달리고 갑자기 넷플릭스 정주행 한다고 밤낮 바뀌는 게 다겠죠. 아무래도 여름방학은 영원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느리게 흐르던 시간과 그리 덥지 않았던 따가운 햇빛 정도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리한테는 연차와 주말과 스스로를 돌보고 먹일 능력이 (이젠)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