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본 결과 엄마의 많은 친구들과 엄마는 인생의 형태가 비슷하다. 다 큰 자식이 있고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남편이 있고 부모/시부모나 손주는 있거나 없다. 엄마와 엄마의 새 친구들은 서로의 비슷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아주 다른 것으로 밝혀지는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선뜻 서로의 집에 서로를 초대하고 음식 같은 것을 나눈다. 엄마의 새 친구 이야기를 듣는 건 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때로 엄마의 사교는 새 친구의 정치 성향이나(”## 씨가 전에 수건을 줬는데, 집에 와서 열어보니까 태극기부대 집회 참가하고 받아온 건 거야…”) 맹목적인 아들 사랑 및 자랑(”&&네 놀러갔는데 아들 자랑을 2시간 동안 하는 거야… 그놈의 아들 헬스장 다니는 백수던데…”)으로 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새 친구는 길거리에 말 그대로 널려 있으므로 엄마에게 누군가와 우정의 중단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하다.
그런 엄마의 딸이지만 나는 아주 까다로운 기준으로 친구를 고른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까지는 친구 사귀기 그 자체에 미쳐 있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이야기 보따리를 끌고 나타나고 나는 그 이야기를 한 입에 삼키고 싶어 전전긍긍했으니까. 물론 내 이야기도 꾹꾹 눌러담아 초대형 상추쌈으로 상대방의 입에 우겨 넣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때의 친구 중 지금까지 친구인 이들은 한 손에 꼽고, 누가 내 입에 자기 이야기를 들이밀려고 하면 냅다 도망친다. 사회에서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이들, 그러니까 ‘사회 친구’들이 ‘진짜 친구’보다 많아질 거라고 하면 예전의 나는 그 말을 믿을까?
‘사회 친구’들은 우선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비슷한 이야기에 웃고, 비슷한 이야기에 화를 낸다. 취미 동호회가 아니라 일터에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 9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터에서 함께 부대끼다 보면 결국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남는다. 이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한다. 게다가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친하게 지내야 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마음에 안 들면 스윽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미안하지만 장점 중 하나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사회에서 친구 사귀기는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보다 훨씬 쉽다.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마이쮸 먹을래?’라고 하는 건 매우 큰 리스크를 져야 하는 일이다. 즉시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본분은 친구를 사귀고 사회성을 기르고 까르르 웃고 놀고 가끔 공부도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직장인의 본분은 그저 월급만큼 일하기. 친구를 사귀려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이쮸를 주든 피자를 사주든 그건 대체로 내 인생에 별 상관 없는 일이다. 고맙고 맛있겠지 뭐…
그러니 어디에서든 새로운 친구를 낚아채고 싶어하는, 그런 주제에 마이너 성격인 나 같은 사람은 상대방이 나의 마이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걸 먹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느긋하고 음흉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상대방에게 나는 친절하고 간식을 많이 갖고 다니는 동료일 뿐 ‘친구 후보1’이 아니니까. 사실 엄청난 어떤 행동을 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1) 먼저 2) 친근하고 밝게 3)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 세 가지 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큰 호감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친해진 친구들은 지겨운 매일을 버텨낼 힘이 된다. 어떤 회사에서의 한 시기는 치 떨리게 싫었던 상사로도 지지부진 속을 끓였던 프로젝트로도 기억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백반집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돌솥비빔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던 순간, 직장인이 제일 졸리고 배고프다는 오후 4시에 살짝 지하로 내려가 사먹던 핫바, ‘지금 회의실에 있는 ## 님 표정 최악! $$ 팀장이 또 괴롭혀요?’ 같은 메시지, 라운지에서 커피타임 가지려고 꾸역꾸역 이른 출근을 하던 날들로 기억된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까 이 새끼를 어떻게 없앨까 가열차게 고민하면서도 그러느라 바쁜 와중에 친구들을 마주하면 그보다 반가울 수 없다. 그러니 놀고 싶은 나이란 만 2세부터 만 80세까지를 뜻하는 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