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본 영화들이 죄다 너무 뜨거웠습니다. <탑건: 매버릭>을 보고는 손에 땀이 흥건해졌고 심박수가 127까지 올라가버렸어요. 이 정도면 직접 전투기에 탄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왼/오/왼/오/왼/오 협곡을 통과하고 기체를 뒤집어 산을 하나 넘었다가 급강하하면서 목표물에 기적처럼 폭탄을 투하하고 7.5G의 중력가속도를 이겨내면서 다시 급상승해 산맥을 넘으면 한숨을 돌리기는커녕 적기와 유도미사일이 미친듯이 쏟아진다고 생각해보세요. <탑건: 매버릭>은 당신을 실제로 그 비행기에 태워줍니다…
자칫 유치찬란한 클리셰, 맥락 없는 에어쇼 범벅의 그저 그런 헐리웃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겁다’는 감각이 온몸을 지배해요. 이렇게 클리셰 범벅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서 슬픕니다. 하지만 모든 면이 빠지지 않는 오락 영화를 만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보면 이 모든 클리셰를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다는 게 이해되시겠죠.
게다가 이 영화는 형식과 내용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진짜’로 찍었고, 내용마저 ‘진짜’를 포기하지 못하는, 심지어 ‘진짜’가 모든 것을 이기는 이야기니까요. 진짜란 뭘까요? 진짜를 찾는 건 유치하다, 이 세상에 진짜가 어딨냐, 진짜 진짜는 가짜다 등등 수많은 트릭과 안티 히어로가 판치는 영화판에서 별안간 나타나 ‘내.가.진.짜’를 외치는 파일럿들을 보면, 결과는 뻔합니다.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면서 진짜는 진짜구나… 를 되뇌일 뿐이죠. 진정성 타령마저 한물 가버린 시대에 진심펀치를 날려버리는 영화. 그게 바로 <탑건: 매버릭>입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 이 말은 너무 순진하게 들립니다. 만약 안 통하면 그건 누구 탓일까요? 진심을 짓밟은 사람 탓? 진심으로 진심을 다하지 않은 사람 탓? 탑건의 파일럿들은 언젠가 자동운항장치로 대체되겠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탈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에게 진심은 통한다는 말은 쓸모없어 보입니다. 진심이란 딱히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떤 양파쿵야가 광기에 찬 맑은 눈빛으로 ‘진짜’를 말할 때는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진짜는 진짜구나…
<탑건: 매버릭>이 젊은 탑건들과 한 양파쿵야가 뿜어내는 열기로 사람을 겉에서부터 서서히 지글지글 달궈지게 한다면, 뱃속에 불덩이가 들은 것처럼 속에서부터 습한 열을 훅 뿜게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기후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올 여름 말복엔 <RRR>을 보세요. 괜히 불쌍한 닭을 잡을 필요가 없는 친환경 보양입니다. 3시간 동안 땀 한번 쭉 빼고, 더위와 냉방병으로 어딘지 고장난 것 같은 몸뚱이를 한번 소독하고 냄비에 팍팍 삶아내서 말끔해지는 기분을 느껴보세요! <RRR>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냥 ‘인도 영화’라는 말로는 이 작품의 반의 반의 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보통의 영화가 기-승-전-결로 이루어져 있다면, <RRR>은 강!(아주 잠깐 쉬고) 강! (아주 잠깐 쉬고) 강! (잠시만요) 강! (아 진짜로?ㅠㅠ) 강! (헐떡거림)…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실제로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는 게 느껴져요. 여기서 정신력 소모란 머리를 써야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머리를 쓰지 않아야 해서 정신력이 소모된다는 뜻입니다. 생각이라는 걸 절대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피로해져요.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를 3시간 동안 하게 되니까요. 매 순간 자괴감도 듭니다. 내 상상력이 이렇게 빈약했나?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지만 <RRR>은 매 순간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면서 저의 얄팍한 예상을 파괴합니다. 아드레날린 그 자체, ‘굿판’ 그 자체, 인도 각시탈 그 자체… 자꾸 말줄임표를 쓰게 되네요… <RRR> 앞에서는 자꾸만 저의 존재가 작아집니다…
보통 영화를 보고 나면 제일 강렬했던 한 장면이 기억에 남기 마련입니다. 아 그 영화? 이 장면 쩔잖아~ 이런 식이죠. 하지만 <RRR>은 다릅니다. 야 <RRR> 봤다고? 이 장면 미쳤잖아… 아 그 장면도 미쳤잖아… 아 맞다 그것도 진짜 돌았잖아… 이렇게 20개가 넘는 미친 시퀀스가 있습니다.
왜 이 영화를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건지, 누군지 모를 책임자를 붙잡고 대화라도 나누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왠지 웃기고 어이없는 그 무엇으로 설명한 것 같지만 <RRR>은 진짜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거든요. 음악도, 영상도, 스케일도 장난 아닙니다. 신화적으로 느껴질 만큼 웅장한 스토리도 좋고요. 무엇보다 여름에 보기 딱 좋은 이열치열 영화입니다. 부작용이 있다면, 이후로 어떤 영화를 봐도 지루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는 해요. 그치만 <RRR>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후에 <헤어질 결심> 재미있게 잘 봤어요.
너무 주절주절 길어졌죠. 어느새 8월이네요. 올해 여름엔 별다른 거 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건강 잘 챙기시고 영화도 몇 편 보고 맛있는 제철 과일도 먹고 하면 된 거죠. 한편 벌써 월요일이에요. 이번주도 힘들겠지만 소소한 휴식 챙기길 바랄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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