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강당 한 켠에 마련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 학교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길 건너 동사무소 지하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주말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가서 진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자주 그렇듯 오래된 책, ‘어른’ 책, 두꺼운 책도 아주 많이 읽었다. 제일 싫었던 건 독후감을 써야 해서 읽는 책이었다. 독후감을 비롯해서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싫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글이 가득하고 이걸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내가 쓰기까지 해야 한다고?
갑자기 글쓰기를 시작한 건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일기 쓰기 숙제를 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대해 급발진 글쓰기를 해버렸다. 초등학생용 줄 공책 세 쪽을 빽빽하게 채운 글이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당선인 부부의 인사와 많은 지지자들의 호응이 꼭 축제처럼 느껴졌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재미도 의미도 없는 글이었겠지만 나는 그때 어떤 희열을 느꼈다. 그건 그냥 ‘쓴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기쁨이었다. 연필을 꼭 쥐고 빈 종이를 글자로 채우는 행위. 손에서는 자꾸 땀이 배어나오고, 오로지 나 혼자서 내 생각을 종이 위에 남기는 시간들.
그 뒤로는 학교에 숙제로 내던 일기를 쓰지 않았다. 대신 핫트랙스에 가서 어른들이 쓰는 두꺼운 ‘노트’를 하나 샀다. 초등학생용 공책과 어른용 노트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노트에 ‘펜’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마 대부분은 일기였을 거다. 그때 나는 온갖 밴드 음악을 들으면서 계속 끄적댔다. 너무 싫고 웃긴 청소년이었겠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쓴 글을 다 합치면 얼마나 될까? 꼭 '안락사 찬반' '사형제도 찬반' 같은 걸 주제로 냈던, 누가 더 자극적인 주제로 단순무식한 찬반토론 시키나 자랑하는 대회 같았던 중학교 백일장. 야자 하라고 가둬놓은 칸막이 책상 아래로 오고갔던 수많은 쪽지와 편지지들. 앉은 자리에서 다섯 시간 동안 7천 글자를 써내려야 했던 대입 논술시험. 한컴타자 베네치아 게임마냥 쏟아져내리는 인문대 과제와 시험들. 사이사이 당연히 싸이월드 일기를 엄청나게 써댔다. 그것도 모자라 뭔가를 더 써보겠다고 들어갔던 대학 잡지사까지 통과하고 나니 갑자기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 몇십 쪽씩 원고를 쓰고 고쳐야 했다. 그 일을 4년 넘게 했다.
뭘 쓰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말하는 만큼 마구 써대던 버릇이 일로 글을 다루면서 사라졌다. 제일 먼저 SNS에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곧 일기도 안 쓰게 되었다. 쓰는 거라고는 가끔씩 출간되는 책들의 보도자료, 마케팅 문구, 짤막한 정보 박스가 전부였다. 친구들하고 카톡을 할 때도 자음, 비속어, 이모티콘 빼면 남는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다. 말이 막아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뭔가를 자꾸 써댔는데, 아무 재료나 가지고 지지고 볶아서 어떻게든 접시에 올려 내놓았던 거 같은데, 참 황당하게 그게 어떻게 했던 건지 기억도 안 났다. ‘연봉 3천 그날까지 존버’ 하다 보니 매일 하는 일이라는 게 그저 레토르트를 데워서 예쁘게 플레이팅해서 손님상에 내서 열심히 파는 거 같았다. (연봉 3천까지 만 3년 걸렸음)
물론 이때 정말 아무것도 안 썼던 건 아니다. 인생의 중간중간(?) 사는 게 힘에 부칠 때마다 잠깐씩 팬픽을 쓰기도 했다. 그건... 갑자기 일하다 말고 뒷산으로 달려가서 버섯 캐고 풀뿌리 캐서 흙만 털고 입에 넣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진짜 기괴한 것들이었는데 정말 살기 위해 썼다. 에픽하이, 서태지, 워너원 팬픽을 써본 사람이 있다? 일종의 보릿고개 경험담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 기억 나는 것들만 대충 떠올려봐도 편당 2-3만 자는 우습게 넘는 단편들을 10개는 넘게 썼고 장편도 몇 번 시도했으니 미치광이가 맞다.
어떤 가수의 팬인 것과 별개로 ‘팬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화르륵 생겨났다가 금방 꺼졌으니 어쩌면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그건 ‘뭔가 쓰고 - 창작하고 - 싶다’는 욕구를 때마침 좋아하고 있던 창작자/퍼포머를 통해 쏟아내는 일종의 살풀이였던 것이다. 사람이 풀 건 풀고 살아야지 계속 억누르면서 살면 괜시리 남한테 짜증내고 욕구불만 생기고 그러다 엄한 사람한테 살 날리고 그렇게 되는 거니까… 건강한 해소였다고 할까? 변명이 자꾸만 길어지네… 아무튼 보릿고개를 그렇게 넘었습니다.
어쨌든 글 써서 먹고살 줄 알았던 시기를 지나 글 만져서 먹고사는 현실에 도달하고 보니 뭐랄까 참 별 게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운운이 아니라 진짜 별 게 없었다. 무엇보다 내 통장에 남는 게 없었다. 돈이 없어. 가난해. 일은 참 재밌고 적성에 딱 맞는다는 걸 알겠는데 돈도 이것보다는 많이 벌고 싶었다. 물론 재밌고 잘하는 일 하면서 돈도 많이 버는 행운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간쯤 어드메의 밸런스를 찾아 이직도 했다. 결국 지금은 글은 글대로 많이 쓰고 말은 말대로 많이 하는 시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말 많으면 물에 빠져도 입만 뜬다던데 나는 속에 남긴 거 하나 없이 다 말하거나 써버려서 가라앉을 거 같다.
왠지 운명처럼 글을 쓴다는 일에 끌리는, 궤도를 따라 태양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별에 스스로를 비유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뒤죽박죽 궤도를 가진 별은 없을 것이다. 또 '글쓰기'가 그렇게 막 엄청난... 태양! 에 비교할 무엇도 아니다. 실제로 '쓴다'는 행위는 참 비루하다. 하나도 멋지지 않다. 새하얗다 못해 파란 화면, 못생긴 단어들, 억지로 잇는 문장들, 포장, 위선, 썼다 지우기, 삭제, 다시 되돌리기. 하지만 그 과정을 참아내면 가끔 멋진 일들이 벌어진다. 그 수많은 멋진 일들 중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다행히 하나 있다. 어떤 사람들을 피식 웃게 만드는 일이다. 잠깐 친구랑 수다떠는 그런 느낌으로.
벼락같은 깨달음, 인생이 바뀌는 교훈, 심금을 울리는 감동, 빠져나오기 어려운 몰입감... 은 애초에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어서 드릴 수가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는 제법 알고 있다. 티가 나기도 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좀 멋지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콘텐츠 광인으로 살면서 많은 것들을 읽고 시청하고 청취하고 듣고 보아온 결과 진짜 웃음을 줄 수 있는 심심풀이라는 게 참 귀하더라는 거다. 요즘엔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걸 듣고 싶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쓴다. 재밌는 일상 블로그 들어가면 거기 있는 모든 글 다 읽는, 나 같은 사람들 꽤 있잖아요.
2018년에, 아니면 2019년일지도 모르겠는데, 글을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레터를 작년 여름에 시작했으니까 거의 3-4년 만에 행동으로 옮긴 셈이다. 그때 그 생각을 기록해두면서 이렇게 썼었다. “만들게 되면 만나게 되겠지요.” 어쨌든 난 만들었고 여러분과 만났다. 오늘따라 그게 참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