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할 게 있습니다. 지금은 수요일 밤 10시 4분이고 저는 아주 피곤한 상태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반가운 봄비가 왔죠. 마음은 반갑고 상쾌하지만 몸은 습도와 저기압에 처지는 게 저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9시에 출근해서 9시가 가까울 때 퇴근했고 열한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아직 못다 한 일을 더 많이 남겨두고 왔어요. 늦은 저녁으로는 대충 햄버거나 시켜 먹을까 고민했지만 꾹 참고 야채를 잔뜩 넣은 비빔면을 끓여 먹었고, 설거지와 빨래 정리까지 다 마치고 드디어 책상 앞에 앉은 참이에요.
레터고 뭐고 잠이나 때려 자고 싶지만 느슨해진 발송 주기에 긴장감을 주고자 스스로 기강을 잡아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술을 곁들이지 않았어요. 집에 맥주, 위스키, 소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토닉워터에 얼음까지 준비되어 있지만!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짤막한 글이라도 마무리지으려면 논-알콜 정신상태가 필수니까요. 참 누구보다 반주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요즘은 다른 사람 혹은 스스로의 반주 제안을 슬쩍 거절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저는 술을 참 좋아합니다. 모든 술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아저씨 같은 소리는 굳이 덧붙이지 않겠지만 아무튼 주종을 가리지 않고 좋아해요. 좋아하는 술 이름을 따서 회사에서 이름 대신 쓰는 닉네임을 지었을 정도로, 한때 모든 자기소개란에 ‘책과 술’이라고 적었을 정도로, 그 어떤 고민보다 이 술에는 어떤 음식이/이 음식에는 어떤 술이 어울릴까 하는 고민이 가장 달콤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재적인 마리아주/메뉴 선정이라는 칭찬이 웃기다는 칭찬 다음으로 뿌듯할 정도로, 술 땡길 때의 첫 한 모금이 세상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나다고 믿을 정도로요. (오타쿠 특: 급발진함, 벅차오름)
좋아하는 정도에 비해 잘 먹지는 못해서 종종 반대편 저울에 다른 걸 올리고 눈물겨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지금 와인을 한 병 더 시켜 마시는 대신 허름하게 내일 점심 약속 미루기, 지금 맥주 한 캔을 곁들이는 대신 내일 일어날 때부터 컨디션 안 좋기, 지금 소주 각 1병씩 더 하고 내일 시험 째기, 지금 곱창행 번개에 몸을 싣는 대신 오늘 할 일을 내일의 - 숙취에 찌들어 있을 - 나에게 넘기기.
이 슬픈 저울질에서 무조건 술 편을 들었던 20대 초반을 지나 매일 저녁 식사에 팩소주 하나씩을 비우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 있었고, 슬슬 주말이 아니면 과음을 삼가던 적응기(?)도 벌써 거의 10년 전 일입니다. 사실 이 적응기(?)는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무조건 폭음을 하던 시절입니다. 누가 그러라고 협박이나 한 것처럼 금요일 폭음 > 토요일 새벽 귀가 > 토요일 저녁 기상 > 또다시 기어나가 폭음의 파괴적 굴레에 빠져 있던 때… 를 다행히도 멀쩡한 간으로 지나쳐 슬슬 ‘컨디션 조절해야지’ 같은 대사를 치며 술자리를 마무리하는 지금이 있습니다. 21살의 제가 지금의 저를 봤다면 몸에 심각한 병이 생겨 저러나 걱정했을지도 몰라요.
보통은 술 먹고 큰 사고를 한번 치거나 잊을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들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줄이거나 끊는다던데, 저는 딱히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술 먹고 친 제일 큰 사고라봐야 친구 등에 업혀가다 어깨에 토한 거, 지하에 있는 술집에서 오지게 마시고 집에 가려다 1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에서 그대로 뒤로 자빠져 죽을 뻔한 거(기억은 안 남) 정도고요. 술 때문에 몸에 큰 이상 생긴 적은… 알콜성 치매인가 싶게 머리가 나빠지고 있는 것 말고 없습니다. 물론 미치게 많이 마신 다음날은 물만 마셔도 하루 종일 꼬부기 물대포인 양(생략)…
반대로 술이 저한테 준 행복한 순간들은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죠. 친구들하고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서 눈물 흘릴 만큼 웃었던 때 - 진짜 너무 웃긴데 다음날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려면 하나도 안 웃겨서 억울함 - , 소주 각 세 병 하고 나서 술 때문인지 떨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빨개진 얼굴로 한 고백, 혼자 영화 보면서 때려마시다가 하하 웃고, 갑자기 엉엉 울고, 그런 내가 웃겨서 다시 웃었던 순간, 친구들과 마시다 갑자기 친구들의 친구들까지 모여 얼렁뚱땅 단체 손님이 되어버린 날들. 무엇보다 술 참 맛있잖아요. 먹는 일에 큰 흥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네이버 지도에 맛(술)집 별이 빽빽히 내리고 뽈레니 캐치테이블이니 하는 맛집 전용 앱도 열정적으로 쓰는 걸 보면요.
제가 살면서 가장 꾸준히 해 온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술을 마시는 일입니다. 엄마한테 이 얘기 했더니 “그래 니 잘났다”고 하시긴 했는데요. 엄마가 자식농사를 망쳤든 어쨌든 진짜로 15년 동안 한번을 안 쉬고 꾸준히 한 건 이게 처음입니다. 역시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나봐요. 이렇게 소중한 술이, 근 15년을 저와 함께하면서 한번 다툰 적도 없던 술이 이제 슬슬 저의 2순위로 밀려나는 게 느껴집니다. 이건 참 쓸쓸한 기분이에요. 진짜 친구와 멀어지는 것과는 영 다른 일방적인 미안함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 같은, 나만 알던 상상 친구를 서서히 잊는 기분이 이럴까요? 저에겐 상상 친구가 없었어서 잘 모르겠지만… 늘 나에게 기쁨만 주던 어떤 존재에게 ‘넌 이제 내 1순위가 아니고 나한테는 너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아’ 라고 말하는 기분. 헉 말하다보니 정말 슬퍼졌어요.
누가 보면 이제 술 끊는 줄 알겠네요. 어제도 새로운 술집에 가서 여기 소츄 겁나 맛있다고 난리를 친 주제에 말이죠. 이건 어떤 균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찾은 균형이요. 앞으로도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밤새 술을 ‘처’먹을 테고, 가끔은 꼬부기 물대포처럼(생략)… 또 수많은 식사를 반주와 함께 하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 다음날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걸 최선의 가치로 여기고, 막걸리집에 찾아가는 일정 앞에 슬쩍 등산을 끼워넣고, 한 병 더 마실까? 하는 마음의 소리에 얄짤 없이 “악즉참!”을 날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책임질 일의 범위가 넓어지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덜 보게 되고 어둑함보다 신선한 공기가 더 달다는 걸 배운 덕분이겠죠. 시간이 가져다준 이런 변화가 술과 저의 관계를 더 오래 더 사랑스럽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요. 술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의 관계가 그렇듯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