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놀러온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은 음식물 반입 금지 정책으로 운영된다고. 그래서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냄비 안에 음식을 담아와 먹고 다시 그 냄비를 가지고 돌아갔다. 돌이켜보니 미친 사람이 따로 없다. 변명을 하자면 30년 동안 살아온 본가에도 ‘음식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다루고 관리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다. 음식이나 식재료 같은 건 잘 몰라서 신비하고 두렵기까지 한 그 무엇이었다.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도 잘 못하는데 뭔가를 해먹는다니? 버겁기 그지없는 과업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김밥이나 샌드위치, 과일 같은 것만 먹고 살겠나요. 우리 집의 음식물 반입 금지 정책은 슬슬 ‘배달음식은 피자까지 허용’, ‘껍질까지 다 먹는 과일은 괜찮음’ 같은 예외 조항을 덧붙이더니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책이 사라지는 데 2년 정도가 걸렸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를 열면 야채 칸에는 참나물, 세발나물, 느타리버섯, 토마토, 양배추, 골드키위, 파프리카, 가지와 양파가 들어있고 술 칸에는 와인과 맥주, 위스키, 토닉워터가 구비되어 있으며 김장김치나 다를 바 없는 당근라페는 당연하고 달걀과 마늘, 그릭요거트, 굴소스와 연두, 어제 해먹고 남긴 야채카레가 냄비째 잠들어 있다.
냉동실에는 얼린 식빵, 두부텐더, 얼음, 냉동야채, 술 먹고 취해서 사온 돼지바와 찰떡아이스가 있고 올리브유, 식용유, 바질, 통후추, 소금, 설탕, 고추가루, 참기름, 페퍼론치노 같은 조미료가 엄마 집보다 많다. 햇반이랑 라면, 컵라면, 컵밥, 파스타 면 같은 인스턴트 식품도 당연히 있다. 한마디로 잘 해먹고 산다.
이런 극단적인 변화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우선 나는 생각보다 뭔가 해먹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본가에서는 모두가 소식을 하고(넷이 고기 조금 굽고 햇반 하나 데우면 안 부족하게 먹는 정도의 양이다) 다들 바빠서 집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급식을 먹었고 대학 때는 학식과 술집이 끼니를 책임졌고 회사에 다니면서는 입맛을 잃어 뭘 먹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맨날 퇴근하고 팩소주 하나씩 먹은 것만 기억남… 주말엔 뭘 먹었을까? 라면이나 짜파게티 한 끼 먹고 분식 시켜서 한 끼 먹고 치킨 한 마리 시켜서 셋이 좀 깨작대다 남기면 주말이 다 갔다.
나름 4인 가족이 살았는데 밥솥이 없었으니 말 다 했다. 누구네 식구들은 일주일 만에 귤 한 박스를 다 먹는다더라, 그 집은 한번 장을 보면 몇십만 원은 일도 아니라더라 하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본가 냉장고에는 엄마 친구가 해다준 밑반찬, 외할머니가 담가준 물김치 같은 게 외롭게 몇 통 들어있고 나머지 공간은 술과 술안주, 과일로 가득하다.
그런데 혼자 파스타도 해먹어 보고 전도 부쳐보고 샐러드도 해보니 이게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실컷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컵라면을 먹고 있으면 몸이 썩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느니 샌드위치라도 조립해 먹는 게 나았다. 국물이 먹고 싶으면 라면 반 개에 순두부랑 계란을 넣어 먹었고, 라면 끓일 시간에 파스타 볶아 먹는 게 나았고, 너무 일찍 닫는 샐러드집의 내려간 셔터 앞에서 망연자실하느니 부지런히 집에 가서 에어프라이어에 두부랑 야채를 때려넣고 구웠다. 물론 우리 집에도 밥솥은 없다. 집에서 밥 냄새 나는 게 너무 싫다. 급식실이나 구내식당에서 나는 냄새 같다. 그래서 냉동실에서 밥 꺼내 돌리고 밑반찬 한두 개 꺼내서 뚝딱 밥을 차려먹는 걸 못한다. 때로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챙겨줄 시간이 없다는 거다. 마음이 못나지지 않도록 기강 잡으려면 뭔가 해먹는 게 최고다. 어떤 유튜버가 얼굴에 7번인가 8번 스킨을 바르면서 나를 아껴주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어 좋다고 했는데 나는 당근을 채칼로 북북 긁어내며 멍때리는 시간을 갖는다. 원래도 혼자지만 더 혼자 있고 싶을 때, 멀고 긴 길을 걷고 싶지만 몸은 지치고 밖은 어두울 때, 하루 종일 남 좋은 일만 시킨 거 아닌가 하는 심술궂은 마음이 들 때, 뭐라도 씻고 썰고 끓이고 볶아서 내 앞에 한 그릇을 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억울한 마음이 든다. 혼자 뭔가를 만들어 먹는 건 아무에게도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일이다. 내가 사고, 다듬고, 요리하고, 먹는 음식은 그래서 온갖 심술과 억울함과 때로는 분노까지 없애준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그게 뭔지 아직은 몰라도”, 잘 먹는 것과 잘 사는 게 아주 긴밀한 연결이라는 건 안다.
오늘은 되도록 일찍 퇴근해서 어제 해둔 카레를 먹고 ‘무한양배추’를 만들어두려고 한다. 서브웨이 에그마요도 충분히 맛있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마토카레에서 가지랑 샐러리, 느타리버섯을 건져 먹으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살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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