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기대되지 않을 때 작은 이벤트들을 만들어두고는 합니다. 이제 제가 깨야 하는 인생의 필수 퀘스트는 없어서, 10년 전까지 그랬듯 하루하루 퀘스트를 깨고 준비하는 방식으로는 삶을 추동할 수 없거든요. 그 이벤트란 이런 것들입니다. 일 년 뒤에 스페인 여행가기, 주말에 친구 만나서 술 마시기.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요. 다음 주말에는 대청소하기, 올여름엔 신비복숭아랑 민어탕, 초당옥수수 꼭 챙겨 먹기.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게 대충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고 많은 고민들을 하죠. 저에게 고민을 보내주신 분들이 그렇듯이요. (익명으로 보내셔도 된다고 했는데 한 분 빼고 다 엄청난 실명제였음을…) 재밌었던 건 다들 자기가 제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고민이라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쓰레기 같은 고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제가 아는 한에서는 각자가 가장 잘 하고 있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볼까요.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 시작
- 돈을 똥 싸듯 쓰는 게 걱정이라는 D 님은 누구보다 멋지게 돈을 씁니다. 왜 쓰고도 욕 먹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반대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요. 이번에도 열심히 일하러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잖아요. (축하합니다!) D 님과 같은 회사에 동기로 입사했을 때, 신규 입사자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때 D 님이 한 소개를 아직 기억합니다. ‘나는 돈을 좋아하고 돈을 잘 벌고 싶기 때문에 돈이 모이는 업계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그래서 이 회사를 선택했다.’ 정말 멋지죠. 앞으로도 D 님이 멋지게 벌고 즐겁게 쓰기를 기원합니다. 요맘때도 끊었으니 지출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 제가 아는 K 님은 아무리 말을 막(?) 해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능력을 타고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K 님은 그걸 못 하세요. 그런데 본인의 말이 상대를 상처줄까 고민이라고 하셔서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려우시다면, 차라리 상대방보다 본인의 행복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처음 K 님을 만났을 때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K 님의 선함을 알게 될 거라고 믿어요. 사람 싫어하는 재능으로 따지면 저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이건 믿으셔도 됩니다. 만약 상대가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면? 그냥 맘대로 생각하고 살라고 넘겨야죠 뭐. K 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강아지들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실 텐데요.
-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 놀랍다는 Y 언니. Y 님은 지성과 섬세함이 너무 뛰어난 사람들은 오히려 상처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어요. Y 님이 이해하지 못할 둔하고 긍정적인(???) 사람 중 한 명으로 답변하자면, 세상에는 이런 바보들이 훨씬 많답니다… 다만 친구로서, 언니가 가끔은 이런 대다수의 바보들처럼 웃었으면! 그리고 이건 제가 이런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계속 띄워보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아무말이 좋다고 해주는 걸 보니 Y 님에게도 가끔은 머리를 비워내는 시간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고요.
이밖에 수많은 ‘니가 이걸 고민한다고?’가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한 E의 ‘인생이 재미 없어요’와 야무지고 책임감 강한 J의 ‘뭐 해서 먹고 살죠?’ 같은 고민에서는 웃어버릴 뻔 했다고요. 그리고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별 고민이 없는 것 같은데, 이건 결국 별 생각없이 산다는 뜻하고 똑같더라고요. 결국 모든 고민들은 조금 더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고 싶어서 생기는 거잖아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You make me a better man
당연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더 나은 사람’이 뭔지부터 모르겠으니까요. 착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 인기가 많은 사람? 물론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여러분은 이미 ‘더 나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시겠죠. 애를 써서 하나를 정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길이 또 막막합니다. 착해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우 투를 알아내면 또 놀랍게도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머리로는 알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집안 곳곳과 나 자신의 청결을 유지하고, 야식과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국영수 중심으로 공부하고… 다 아는 소리가 이렇게 줄줄 나온다는 건 모두가 이렇게 떠들고 있기 때문이고, 모두가 떠드는 이유는 모두가 이걸 실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사기꾼이 정말 많습니다. 놀라운 How to, 나만 알고 있는 비법, 세상(과 돈)의 비밀을 알면 모든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떠들죠. (딴소리지만 큰소리로 안 떠들고 조용히 속삭이면 한번쯤 들어줄 의향이 있습니다. 목소리 큰 거 미쳐버릴 것 같아요… <더 글로리> 모든 등장인물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볼륨 1로 해놓고 본 사람… 소음 공해라는 말도 있지만… 너무 큰 목소리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폭력이 아닐까요? 여러분? 제발 동의해주시길) 너도나도 소리 높여 외치는 바람에 뭐가 진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사기꾼들이 멘토라는 이름으로 한탕 해먹기 시작한 게 벌써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악인이 되어야 성공한다’는 멘토(?)까지 등장한 모양이지만 결국 내용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자기 할 일만 집중해서 하고 감정적인 자원 안 쓰면 어느 정도 성공하겠죠 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아무리 누가 놀라운 How to를 알려준대도 그걸 실천하는 건 내 몸뚱이라는 거요. 진짜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게 하는 건 나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일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과도 연결돼요. 나를 잘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고 놀아주고, 나를 스치는 이들에게 친절하기. 사랑과 연대까지 내밀기는 힘들더라도 최소한의 친절을 베풀기. 그보다 작게는 혐오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고민이 다가왔다 또 쓸려 가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안에 쌓인 단단한 친절을 붙잡고 버틸 수 있어요. 미래가 기대되지 않아 권태로울 때, 이 고민이 영원할 것만 같아 무료하고 인생이 지겨울 때, 우리를 살리는 건 아삭한 신비복숭아와 뜬금없는 행인의 친절이니까요. 그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게 인생의 허무와 고민과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는 비밀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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