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들과 외할머니, 엄마와 저와 동생 그러니까 외가 쪽 여자들이 모이면 오디오가 빌 틈이 없습니다. 꽉 차다 못해 늘 겹치고 말죠. 누구 한 사람 목소리가 크진 않은데 작은 목소리 모아 모아 결국은 왁자해지고 맙니다. 평생을 함께 떠들던 사람들이라 어느 정도는 정해진 각자의 수다 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요. 그중 외할머니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별안간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저의 난생설화를 완창해버리기 장인입니다. 저희 엄마도 지겨워하는 이야기를 쭉 뽑아내는데 그 레퍼토리가 판소리나 다름 없어서 대부분은 모두가 외우고 있는 내용이지만, 가끔씩 모두가 까먹고 있던 소재가 튀어나와서 다같이 깔깔 웃기도 해요.
춘향전 사랑가마냥 모두가 흥얼댈 수 있는 난생설화 한 꼭지는 저의 운동 능력에 대한 겁니다. 갓난아기 때 저를 바닥에 눕혀놓으면 다리를 구부리고 한 쪽씩 들었다가 바닥으로 쾅! 쾅! - 할머니가 이 대목을 얼마나 맛깔나게 구연하는지 여러분한테 선보이고 싶네요 - 발길질을 했다고 해요. 말띠라서 그런지 아기 때부터 다리 힘이 얼마나 좋았는지 아냐고,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들어가서는 늘 달리기를 1등 했다고 사실과 살짝 다른 이야기도 섞어 무쳐내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외할머니는 이렇게 아기 때부터 남달랐던 저의 운동 능력을 사랑한 것과 동시에 ‘즈이 애비’에게 ‘운동 능력’을 물려받지 않았을까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잘 키운, 하지만 고생도 시켜 한켠에 미안한 마음이 있는 딸을 시집 보냈는데 사위가 감옥에 갔다면? 그리고 보아하니 ‘그짓’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면? 그 와중에 태어난 귀여운 손녀딸이 왠지 ‘즈이 애비’를 닮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을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책만 읽는다면? 저였어도 조금은 불안했을 것 같습니다.
역시 노인의 감은 쉽사리 틀리지 않아서, 저는 어렴풋이… 아주 흐리게… 아예 없지는 않은 정도로… 반동의 색이 비쳐 보이는 정도로 자라났습니다. 물론 집 벽면을 뒤덮은 책 더미 사이사이에 <강철서신>이나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 저는 나중에 자라서 이 책의 저자를 사장님으로 모시게 되는데요 -, <민중의 바다> 같은 책이 끼워져 있고 심심치 않게 누런 갱지로 겉을 포장한 책이, 그보다 드물게는 낡은 스프링노트에 빼곡이 필사한 책이, 어쩌다가는 직접 집필한 ‘이론서’가 끼워져 있었으니 피에 흐른다거나 DNA에 박혀 있었다는 등의 이유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어릴 때부터 한겨레를 구독하고 한겨레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어깨동무> 같은 캠페인에 참여했던 저에게 2002년은 충격적인 한 해였습니다. 솔직히 월드컵 경기를 본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 당연히 국대 팬카페는 가입했고 홍명보 좋아했습니다 - 안톤 오노와 미군 장갑차와 <퍼킹유에스에이>는 너무나 생생하네요… 그에 더해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고, 갑자기 질풍노도의 중학생이 되었고, 당시 참여연대 계열에서 운영하던 청소년 단체(?) 아이두에 가입했고 이명박이 당선되고 광우병 촛불집회에 나갔고 ‘촛불소녀’ 운운으로 매도되었지만 그땐 그 불쾌감이 뭔지 몰랐고 꼭두새벽에 몰래 학교에 들어가 교실마다 “나가자! 광장으로!” 이런 전단지를 붙였으나 그때 뜻을(?) 함께 했던 친구와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고 그러다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저는 반미와 함께 자라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그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한껏 웃어봅니다…
어쨌든 대학에 입학한 뒤로 저는 운동exercise이라는 게 세상에 없다는 듯 굴었습니다. 하루종일 캠퍼스 곳곳을 쏘다니는 데 굳이 또 시간을 들여 운동이라는 걸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그렇다고 고등학생 때처럼 (이유 없이) 복도나 운동장을 질주하거나 하물며 얼음땡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때의 제 몸뚱이가 젊지 않았다면 행여 공부를 열심히 해서 허리가 안 좋았다면 어땠을지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대학에서는 또 다른 운동movement이 저를 둘러쌌습니다. 학생정치조직에 가입하거나 운동권이었던 건 아니지만 또 완전히 그들과 먼 ‘일반 학우’ - 눈물 나는 명칭이지만 달리 지칭할 말을 못 찾겠네요 - 였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고요. 아무튼 저는 조기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 취재라는 이름의 연대를 가장한 얼레벌레 참여자로 몇 년은 그 언저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나니 그곳은 또 완전히 다른 세상.
무브먼트도 엑서사이즈도 없는 월급과 출근길 만원 지하철의 세계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딴 소리지만 그때 제 이력서 사진을 보면 참 웃겨요. 사진관에서 빌려 입은 정장 자켓을 걸치고 한껏 프로페셔널의 표정을 짓긴 지었는데, 지금 보면 아기가 따로 없고 그때 저한테 일을 시켰던 놈들을 다 신고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아기가 일 달라고 찾아오면 과자 하나 쥐어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거 아닌지… 아무튼 그렇게, 2002년에서 2009년보다 더 빠르게 2014년에서 2018년 정도가 가버렸습니다.
그러다 2019년에 저는 마음으로 한 운동movement을 받아들였습니다. 탈 코르셋 운동을요. 어느날 갑자기 화장품을 다 버렸고, 또 어떤 날에는 하이힐을, 다른 날에는 ‘사탕 껍질’ 같은 옷을 처분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한 게 숏컷과 투블럭 그 사이 어딘가로 머리를 깎는 거였습니다. 당시 그때의 기분과 다짐과 마음을 적어두려고 무진장 노력했었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나 뚜렷한 건 시작은 의무감이었고 지금은 몰랐던 자유가 더 크다는 점입니다. 그땐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아이라인을 그리고 핑크색 형광펜으로 입술을 칠한다는 게 너무 미안했어요. 남들만큼은 꾸밈 노동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더욱. 그치만 지금은 이 모든 게 숨 쉬듯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때 저의 의무감이었던 친구들은 조금이나마 더 자유롭기를 바라고요. 앞으로 이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지, 어떻게 다듬을지 계속 생각해봐야죠.
또 2019년에, 저와 제 친구들은 갑자기 운동exercise을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죠. 누구는 헬스를, 누구는 요가를, 수영을, 필라테스를, 축구, 야구, 주짓수를.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는 마음의 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였기도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되찾아서기도 합니다. 우리는 운동으로 흔들리는 몸을 다잡고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없이 게으르게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애플워치를 차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말벌 아저씨처럼.
이제 두 운동은 모두 저와 함께입니다.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인생이 앞으로 굴러갈 수 있게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죠. (솔직히 보조바퀴로 술이 붙어 있기는 한데…) 언젠가 이 둘, 혹은 하나가 저를 다시 떠날까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려고요. 신념이든 기립근이든 두 코어 중 하나라도 없다면 저는 휘청휘청 걷다가 어디엔가 콕 고꾸라질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조기 교육을 받았다보니, 말띠이기도 하다보니, 그럴 확률이 높겠죠. 그리고 요즘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브먼트든 엑서사이즈든 내 안에 운동이 쌓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다고요.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손을 누가 잡을 수 있겠어요. 이제 날이 더 풀리면 밖으로 나가 달려야겠습니다. 솟구치는 팔, 뛰어나가는 다리, 서로의 웃음을 만나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