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엔 <해리포터 레거시>를 해봤습니다. 모두가 예상했듯 슬리데린에 배정되었고 호그스미드에 가서 지팡이 맞출 때 최고의 (기쁨의) 비명을 질렀어요. <일타스캔들>을 보면서 베개를 퍽퍽 쳤고 간만에 술집에서 진탕 마시고는 오블리비아테 걸린 것처럼 기억이 뚝 끊기는 경험도 했습니다. 2주에 걸친 엄마 환갑 잔치까지 치렀네요.
안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든 게 변하고 정신없는 2월이었는데요.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안정적인 내 자리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번 레터는 ‘자리 찾기’에 대한 이야기예요.
정말 예전에 들은 이야기라서 가물가물한데요. 모든 영화는(소설이었나?^^;) 한 인물이 어디선가 출발해서 어디론가 떠나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그 인물은 길을 걷는 동안 반드시 변화한다고 해요. 위대한 이야기라면 정말 저것으로 끝이겠죠.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인생은 영화가 아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는 아주 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통 진짜 인생은 그렇게 도착한 어디선가 정착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으면서 시작되니까요.
믿어지시나요?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라고, 김윤아 언니가 노래한 게 벌써 17년 전 일이란 게요. 새로운 곳에서 내 자리를 찾고 쓸모를 증명한다는 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고 새로 시작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영혼이 가난하다는 걸 필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곳. 그런 곳에서 예전에 가졌던 혹은 한번도 가진 적 없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한번도 요구한 적 없지만 주어진 분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삽니다. 내가 원해서 받은 자리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던 자리도 있어요. 원천이 어찌 됐든 저마다의 자리는 각기 다른 책임감과 역할을 요구해서 버겁죠. 반면 한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거나 어떤 자리에게서 버림받았을 때는 다른 자리가 있다는 게 묘하게 든든해요. 그럴 땐 내가 차지하고 있는 여러 자리들과 그 복잡한 층위가 고맙기까지 합니다. 애인에게 차이면 일에 집중하는 게 도움이 되고 회사에 내 자리가 없을 땐 가족만큼 큰 위로가 없잖아요.
마약 나눠주는 범죄자 모르겠고 성적표 언제 줌?
최근 밥 친구로 <프레쉬 오프 더 보트>를 봅니다. 차이나타운에 살던 중국계 가족이 올랜도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으려 고군분투 하는 우당탕탕 가족 시트콤입니다. 황씨 가족(주로 엄마 제시카)은 그 과정에서 아시안-특히 중국계-의 스테레오타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요. 어떤 편견에 대해 “그거 인종차별이거든요?”를 외치기 이전에 오히려 먼저 나서서 그 편견을 이용하죠.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우아한 수단 같은 거 중요치 않다는 주장 같기도, 중국인들은 이렇게나 실용적이라는 편견을 강화 시키는 블랙코미디 같기도 한 그 모습이 웃기고 슬퍼서 눈물겹습니다. 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어땠나요? 이전 레터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듯 이 영화는 송태섭의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자리 찾기입니다.
이렇게 자리 찾기는 생존하기나 다름 없습니다.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이 있어요. 주위에 선물하느라 지금까지 다섯 권은 넘게 샀을 것 같은데요.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환대를 통해 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장소에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그러니 우린 평등한 존재다, 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촘촘한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곧 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데도요.
아주 작은 환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굳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반면 아주 작은 배척이 또 얼마나 파괴적인 위력을 갖는지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말할 가치가 있습니다. 너는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네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지 스스로 증명해보라고, 우리가 너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이유가 뭐냐고 이야기하는 입은 볼 때마다 참 적응이 안 돼요.
스파이더맨도 에에올도 마찬가지라구
늘 그렇지만 오늘은 역대급 횡설수설이었죠. 아직 생각 정리가 다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날것의 어쩌구를 보내드려 죄송하지만… 최근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많이 봤거든요. 이 기분을 잊지 않고 다짐해두고 싶은 마음에 강행합니다… 자리 찾기의 슬픈 점은 또 이런 거겠죠. 아무리 최선을 다해 도와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돕는 것뿐이라는 사실. 그 지난하고 더럽고 치사한 과정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면서요.
우리 대부분의 인생은 영화가 아니고,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화로 가득합니다. 그 연속되는 변화들과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매 순간 우리에게 또 다른 자리 찾기를 강제하겠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환대라는 게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내일은 다른 사람에게 더 친절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봐요. 영화가 아닌 우리의 삶은 쉽사리 꽉 닫힌 해피엔딩 같은 걸 선물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 바쁜 2월이었습니다. 모든 게 휘몰아쳐서 비집고 들어가 쉼표를 찍을 자리가 없을 만큼이요. 내일이면 벌써 2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이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일도 흔치 않을 테니 모든 게 나아지길!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기강 제대로 잡고 주 1회로 돌아올게요… 그럼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