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를 아시나요? <저주토끼>라는 소설집으로 2022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니 책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보셨을 만한 이름입니다. ‘수상 ‘불발’’이라는 기사 제목이 소소하게 욕을 먹었다는 게 어딘지 더 인상 깊게 남아 있기는 하네요. 잠시 딴 얘기지만 요즘 ‘아쉽게 은메달에 그쳤다’거나 ‘수상이 불발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가는 엄중한 회초리를 맞게 되죠. 오해하실까 덧붙이자면 저도 당연히 저런 방식의 평가 절하가 아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힘들게 살고 있는데 격려와 위로는 못할 망정 뭐 하나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재수없잖아요.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렇게 별로인 발언에 대한 기계적 회초리질도 조금 웃기다고 생각해요. 결국 누구보다 능력주의 사회인 주제에, 누구보다 국뽕을 사랑하면서, 그걸 고칠 생각은 없으면서, 글 한 줄에 냅다 달려나와 다들 말을 얹으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저게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위선이라 해도 위선이 위악보다 백배 천배 낫다고 믿어요. 모두가 제발 위선을 좀 떨었으면 좋겠고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오겠죠. 느리게 한걸음씩 가다보면요. 물론 차별금지법 같은 건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뿅 하고 제정되어 있으면 좋겠네요. 저 위에 적은 회초리질에 대한 웃김은... 그냥 옛 에스에프 영화에 나오는 깡통 로봇의 기계적 반응을 보면서 흘리게 되는 실소 같은 거죠.
정보라 작가의 소설에도 로봇들이 나옵니다. 에스에프 호러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거든요. ‘그게 뭔데?’ 싶지만 읽어보면 진짜로 에스에프이고, 호러이며, 판타지입니다. 너무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서 거의 사회참여문학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곰곰 살펴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은 이미 에스에프 호러 판타지네요. 이 현실을 너무 잘 묘사하다보니 결국 그게 에스에프 호러 판타지가 되었나봐요. ‘그래서 그게 뭔데 *덕아’, 싶으셨나요. 이를 테면 이런 겁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반려 로봇이 있어요. 그 로봇은 이제 너무 낡아서 폐기할 때를 훌쩍 지났지만 함께 한 추억에 얽매이곤 하는 인간은 로봇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오싹한 일들이 벌어지죠. (<안녕, 내 사랑>, ⪡저주토끼⪢, 정보라)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농성을 이어가는 노조와 힘껏 그 싸움에 함께 하는 대학 강사가 있어요. 위원장(분회장인가?) 님은 농성 천막에서 매일매일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대학 건물 복도에 등장한 문어를 삶아 먹게 되고, 그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해요... (<문어>, ⪡환상문학웹진 거울⪢, 정도경)조금 헷갈리시죠? 이건 어떤가요? 120살, 혹은 그보다 나이가 든 한 노인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그 나이는, 여전히 노인이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뮤지션의 팬미팅에 참석하려고 줄을 서기에는 충분히 쌩쌩한 나이입니다. 조각조각 부서진 뼛조각을 다시 이어붙이고 일어설 수도 있는 나이고요.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간호 로봇을 동반한 채 기어코 참석한 팬미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녀를 만나다>, ⪡그녀를 만나다⪢, 정보라)가장 무서웠던 이야기는 이겁니다. 어느날 하얗게 빛나는 변기에서 머리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나타나 말을 걸어요. (<머리>, ⪡저주토끼⪢, 정보라) 이 뒤는 무서워서 더 말을 못하겠네요...
요즘 읽기 딱 좋은 소설이라고 소개해드렸죠. 정보라 작가의 소설들은 요즘 같은 덥고 습한 날씨에 읽기 좋은 으스스한 호러이기도 하고, 요즘처럼 혐오의 힘이 끝을 모르고 강해지는 시절에 읽기 좋은 투쟁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주 먼 미래의 세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 소설들을 읽다보면 알 수 있어요. 지금 우리 곁의 혐오가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진짜 옳고 강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넓은 우주, 몇백 광년의 시간 같은 걸 자꾸 생각하면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될까요? 하기사, 인간을 화성에 보내겠다는 놈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혐오를 내뿜고 있는 걸 보면 광활한 우주가 모두에게 공평한 힌트를 주는 건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그들이 어쩌든 우리는 이번 여름 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읽어요.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나가야죠.
다음엔 영화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다른 순서가 먼저일 수도 있어요.) 주말에 RRR이라는 엄청난 영화를 봤거든요. 마블 세계관을 한번에 이겨버리는 진.짜.영.화니까 관심 있으시다면 미리 봐주세요. 넷플릭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월요일 퇴근길에, 혹은 주말 동안 자가증식한 업무에 뚜까 맞는 와중에 이 편지를 읽으셨나요? 언제였든 잠시나마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라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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