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고난 ‘운빨’이 95% 이상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살면서 마주치는 모두가 저 안에서 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우리는 다들 정해진 틀 안에서 어떻게든 더 행복해지려고,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때로 친구가 답답한 소리를 해도 ‘그래 너는 XXXX(그 친구의 MBTI)니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어가기, 동료가 속 터지는 행동을 해도 ‘세상에는 이런 일을 정말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라고 이해해보기 같은 일.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럼 벙찐 표정을 곧바로 수습하고 미소를 지을 수 있다. ^_____^
인생이 ‘운빨’인 게 사실이라면, 어쨌든 나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도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인생일 테다. 친구 엄마가 친구에게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니 유전자가 아깝지도 않니?” 물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전혀요”지만 일견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무언가 좋은 것을 타고 났다면, 이왕이면 그 자산을 백 퍼센트 즐기는 게 좋을 것이다. 그냥 썩히면 아까우니까. 그럼 어떻게 즐겨야 할까. 지금까지 터득한 ‘인생즐겜러’로 사는 방법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망설이지 않는다. 행동도 말도. 대체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다 운이다. 일제강점기나 군부독재 시절에 살았다면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 수 있었을까?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살다가 서른도 되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90년대에 태어나 2026년을 살고 있는 덕분에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산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건 없다. 기껏해야 친구나 동료들과 불화를 빚는 수준이다. 물론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싸가지 없는 내 말을 참아준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안 참고 나와 멀어진, 혹은 마음 속에서 나를 죽여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 그건 그들의 사정이다.
둘째, 그때그때 충실하게 좋아한다. 연애할 때는 상대를 좋아하고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를 좋아하고 매일의 날씨를 좋아한다. 마음으로만 좋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즐기고 잘해준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진짜로!) 머리도 많이 써야 한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더 행복할지, 어떻게 해야 이 서비스가/이 상품이 더 잘 될지 계속 궁리해야 되니까. 하지만 이렇게 해야 그 순간 행복할 뿐더러 미련이 남지 않는다. 대신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시점이 오면 빠르게 도망쳐야 한다. 맞지 않는 회사에 버티고 있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계속 연애하는 일은 모두에게 재앙이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나 이것을 실천하기는 또 어렵다. 관성과 추억과 내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미련이 자꾸만 나를 방해하니까. 나는 이럴 때 보통 눈을 딱 감고 있는 힘껏 칼을 휘두른다. 그러니까 이런 성격조차 ‘운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셋째,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일할 곳이 있고 - 이게 일 번이라는 사실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 나름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산다고 믿으며 먹고 싶은 과일은 - 조금 망설일지라도 - 먹을 수 있으며 가고 싶은 여행지가 생기면 즉시 떠날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배울 수 있다. 그러니까 돈과 시간과 건강과 마음의 여유가 있고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마저 어떤 문제도 -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어떤 문제도 - 없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정말로 무엇인지.
보통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순간은 남들과 비교할 때인 것 같다. 여기에서 ‘추구미’라는 조금 낡은 유행을 끌고와본다. 나의 추구미는 저쪽에 있는데 현실은, ‘도달가능미’는 여기일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문제는 내가 도달가능미에도 만족하고 마는 국그릇 사이즈 인간이라는 점이다. (종지라기에는 욕심이 많아서 국그릇이다.) 사이즈가 국그릇이라는 점. 이 또한 타고난 나의 운 중 하나다.
인생을 그저 즐기면서 살고자 할 때, 이런 삶의 태도에는 당연히 부작용도 있다. 요즘 열심히 본 <도시여자대피소>에서 - 김초희 감독님이 나온 편은 정말 명작이다. ‘뒷박을 타는 여자’라니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 고아성이 이렇게 말했다. 너무 쿨하게 살려고 했더니 삶이 너무 가볍고 공허해지더라고. (정확한 출처와 워딩을 찾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아시는 분은 제보해주시기를…) 하지만 가볍고 공허하면 어떤가. 어차피 우리는 얼마간 공허하고, 또 언젠가는 말도 안 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심취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평생 그런 시간을 겪지 않고 산다면 ? 그건 또 그것대로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생 그래프가 정규분포라고 하면 지금쯤 X축의 절반 정도에 가까이 왔을 것이다. 인생의 정점이 바로 지금일 거라고 느낀다.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이 구간에서 가장 즐겁지 않을까? 이렇게 무책임하고 멍청하고 거친 추측을 할 때면 ‘날먹’의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정말 인생을 날로 먹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간헐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우려 노력한다. ‘친구를/동생을 도와줘야지’ 같은 말을 듣던 어린 시절처럼. 이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점만 다르다.
그러다보면 가끔은, 당연하게도, 배은망덕한 녀석들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살다보면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니 별 억하심정은 없다. 다만 나와 우연히 엮이게 된 사람들이 작은 행운이라도, 작은 기쁨이라도, 작은 피식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며 산다. (뒤통수 친 놈들한테는 X) 상대가 누구든 그에게 좋은 일 하나쯤은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계단에서 유아차나 캐리어를 들어주면서, 식당에서 옆 테이블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동료와 친구에게 웃긴 말을 하면서, 엄마한테 갑자기 용돈을 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무척이나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이다.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이렇게 건방지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등장인물은 꼭 후반부에 엄청난 삶의 고난과 사고 같은 비극을 마주하고 무너진다. 그것이 내가 기다리는 나의 미래다. 건방지고 오만하게 살면서 동시에 음침하고 은근하게, 언젠가 나에게 닥칠 비극을 기다린다. 이게 인생이 가볍게 훅 날아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나의 무게추다.
애초에 선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생이 언제부터 꺾여나가고 내리막을 타게 될지, 그 순간이 벼락처럼 어느 순간 내리칠지 아니면 시나브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허리춤까지 빠져 있었다는 식으로 발견하게 될지 궁금하다.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슬픈 결말은 이것이다.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여전히 오만하고 어딘가 어리둥절한 (’왜 아무 일도…?’) 표정을 한 노인이 되어 죽는 것. 아직은 기력 넘치는 30대라서 철없는 소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인과 고기>를 보고도 ‘항정살 맛있겠다’거나 ‘노인들이 너무 발성이 좋은데’ 같은 생각이나 하는 얄팍한 정신머리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생에 대해 깨달은 척 떠드는 것이 30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해온 생각이 있다. ‘이 순간은 지금 이 시기에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엄마에게 번쩍 들려 함께 회전목마를 탔던 4살 때 말 모형에서 뻗어나온 손잡이를 꼭 잡고, 야자를 째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던 18살 때 273 버스 안에서, 술을 퍼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던 22살 때 변기통 안에 눈물 콧물 위액을 토해내면서도 이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한다. 이 건방지고 어리석은 생각은 오직 이 때만 뽐낼 수 있는 자만이라고.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 되었든 그 순간을 꼭 붙잡고 즐기는 일이 행복한 인생의 비결이라는 사실이다. 또 이 믿음이 언제 바뀔지, 인생에 대한 낙관에 언제쯤 손바닥 뒤집듯 뒤집힐지 관찰하는 것 역시 이 예측불허인 인생 안에 숨겨진 재미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