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에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다 컸다’는 말을 들은 몇몇 순간들이 있다고요. 새 연고의 뚜껑으로 밀봉을 톡 터트린 8살과 수박을 먹으면서 팔꿈치까지 줄줄 과즙을 흘리지 않게 된 10살, 멋대로 대학 원서를 내버린 19살, 친구들하고 자연을 벗삼아 캠핑을 떠났던 32살에 ‘다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물론 엄마한테서요. 아무튼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증거는 조금 다른 것들입니다. 어른은 참는 존재, 그리고 책임지는 존재.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볼까요. 누군가를 진짜 어른이라고 판단하려면 이런 증거들이 필요합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을 줄 아는 마음.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넘어가는 포용력.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하지만 틀린 일에는 틀렸다고 말하는 용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예쁜 카페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기와 떠드는 어린이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연착되는 지하철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이동권에 대해 생각하기. 틀린 건 ‘서울 시민의 발’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서울 시민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를 시혜로 접근하려는 그들이라고 말하기. 내가 한 약속과 내가 맺은 관계와 내 존재 자체에 책임지기.
한때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이제 어떤 사람 만나야 되냐? 글쎄, 진중권하고 김훈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주위의 고만고만하고 거기서 거기인 놈들한테서 좀 벗어나보자는 소리였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대학 땐 동류하고만 어울렸습니다. 대학 사회 안에는 다양한 집단이 있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겠죠. 가정 형편이 비슷한 동기들하고만 친했고, 동아리엔 정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뿐이었고, 전공 수업에는 문화적 취향이 비슷한 학우들이 가득했어요. 나는 방학 때마다 알바 뛰면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데 방학마다 스키 타러 해외에 가자는 동기랑은 아무래도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요. 지금이라면 학자금 대출 땡기고 스키 여행 갔을 텐데 말이죠. 어쨌든 그런 친구들이 싫었다기 보다는 대학에서 만난 ‘동류’가 너무 반가웠던 것에 가깝습니다. 전교생하고 친구였던 고등학교 때도 너 나랑 똑같구나, 싶은 친구는 없었거든요. 있는 게 이상하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와 다른 사람하고 친구가 되는 게 어렵지 않아졌어요. 그럴 수 있지~ 걔는 그런가보지~ 이런 말들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천천히 친구의 범위가 넓어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넓어진 건 절대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화가 더 많아졌어요) 신기하죠.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면... 가끔 힘들고 아프고 약해질 때면 그냥 비슷한 사람들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어른이 되는 일은 멀고도 힘들어서, 몸이 아프고 정신이 피곤하면 자꾸만 힘이 빠져 미끄러지고 맙니다. 이래서 인생은 끝이 없는 수련이라고 하나봐요.
대충 착 말해도 척 하고 알아듣는 사람하고만 놀고 싶고, 동류라는 안락한 소속감 안에 파묻혀 웅크리고 싶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세상으로 달려나가는 게 뭐? 그냥 이 안에서 행복하면 안 되나? 굳이 뭔가를 바꿔야 하나?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런 의문들을 매번 뿌리쳐야 하는 걸 보니 저는 진짜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봐요.
그렇다고 아예 포기해버리면 영영 어른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한 미숙한 존재로 살기는 싫어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을 가져야죠. 아무한테도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지만, 사는 게 너무너무 귀찮아서 미칠 것 같지만 이왕 태어나버린 걸 어떡해요.
다시 돌아가서, 어른이란 책임지는 존재. 저는 뭐든 책임지고 싶어하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인생을 컨트롤하고 자신을 시험하고 싶은 어린이였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실내를 내버려두고 굳이 베란다에 나가서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어린이… 그땐 아무도 저에게 뭔가를 책임질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자꾸만 혼자 쓸데없는 약속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책임져야 하는 관계와 약속과 일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놨고요. (대체로 즐겁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저는 자꾸 처음 보는 친구의 친구를 만나고,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하면 냉큼 달려나갑니다. 일주일에 여섯 번 약속을 잡는 미친 짓도 마다하지 않아요. 나와 다른 사람들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뭔가를 먹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한번 힘을 내게 돼요. 주르륵 흘러내렸던 언덕 위로 다시 올라갈 수 있는 힘이요. 아마 영원히 기어올라야 할, 정상이 없는 산이겠지만 뭐 어떤가요. 그러다보면 자꾸만 새로운 책임이 생겨납니다. 그 관계와 약속과 일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해요. 아 인생 쉽지 않네. 하지만 지나온 길에는 벌써 이만큼, 어른의 증거가 쌓여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