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11월이 되면 아침마다 창문을 열고 바깥 냄새를(?) 맡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겨울을 마주치면, 마주친다기에는 조금 부족한 힌트를 공기 중에서 찾아내면 그때부터 기다림이 시작된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겨울이야…
11월 말에서 12월 초의 언젠가 시작되는 겨울은, 인심도 좋지, 넉넉히 4개월 정도를 머물다 떠난다. 이 긴 계절을 초겨울, 한겨울, 늦겨울 정도의 3단계로만 나누는 게 아쉬울 정도다. 절기로 따지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겨울이더라. 지금 찾아보니 입동부터 입춘 전, 그러니까 대한까지가 겨울이라고 한다. (경칩이 양력으로 3월 5일경이니 그 전까지도 충분히 겨울 같은데 희한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대설을 지나 동지로 향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번 겨울이 끝날 게 아쉽다. 또 한편으로는 빨리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마음이 급하다. 진짜 내 마음은 뭘까…
겨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캐롤이나 트리, 선물 꾸러미로 대표되는 크리스마스가 있겠고 귤이나 붕어빵, 핫초코, 포장마차 오뎅 같은 겨울 간식이 있고 이런 간식을 까먹으면서 보는 <해리포터> 시리즈나 <나홀로 집에> 같은 겨울 영화가 있고 귀여운 털모자나 장갑, 부츠 같은 겨울 옷차림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것들은 진짜 겨울이 아니라 어떻게든 겨울을 좋아해보려는 노력이라고 본다. 너희는 다 가짜야! (성격 나쁜 사람들만 겨울을 좋아한다는 이론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겨울은 무엇인가? 조금만 맞아도 얼굴이 아리다가 곧 감각이 없어지고 마는 칼바람이다. 눈이 시리고 눈물이 줄줄 흘러도 느낄 수조차 없는 추위다. 너무 무거워서 땀이 날 뿐인지 진짜 따뜻한 건지 모르겠는 코트에 고문당하는 일이다. 오후 다섯 시만 되어도 어둑해지는 을씨년스러운 하늘이고 질척대며 내린 뒤 바닥을 얼음판으로 만드는 진눈깨비다. 푸석하게 갈라지는 피부고 억세게 죽어버리는 나무다. (마조히스트만 겨울을 좋아한다는 이론은 분명 어딘가 있을 것 같다.)
이 고통이 진짜 겨울이고 겨울이 좋은 이유다. 무엇보다 여름의 징그러움이 겨울에는 없다. 여름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 시끄럽다. 미친듯이 살아 움직이고 자라나고 태어나고 변하고 탱탱하고 흡수하고 흡수되고 주룩주룩 내리고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르다. 매일 숨 가쁘게 달리는 여름의 시간이, 젊은 생기가 부담스럽고 번거롭다. 정말 솔직하게는 귀찮다. 이렇게까지 부산스러울 필요는 없잖아, 좀 진정해봐.
겨울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뭔가 자라나지도 성장하지도 않고 현상유지나 하면 다행이다. 삐쩍 말라도 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물도 조금 마셔도 되고 덜 움직여도 되는 계절. 물론 인간은 식물과 달라서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어쨌든 겨울이 좋은 이유는 이렇게 모든 것을 멈추고 유예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같이 아주 느리게 천천히 움직이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 긴 시간을 버텨보자.
겨울잠도 없고 식물도 아닌 생명체라면 겨울에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난방을 돌리고 - 가스비 고지서 열어보기 전에 3초 기도 필수 - 아침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오며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쓰라린 얼굴에 보습 크림을 바르고 티셔츠 위에 두터운 스웨터를 껴입는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오늘은 정말 만만치 않구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미간에 찬 공기가 닿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맑음이다.
겨울만 줄 수 있는 것들은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걷다가 따뜻한 실내에서 조심스럽게 팔다리를 펼치는 일. 커다란 코트 주머니에 작은 책을 넣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펴보는 일. 얼어버린 거 아닌가 싶은 내장에 뜨거운 술을 부어넣는 일. 콧속이 찢어질 것처럼 차가운 공기를 아프게 들이마시는 일. 그 기온이 어이없어서 곧바로 푸하학 입김을 내뿜으며 웃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눈 덮인 겨울의 강원도 모처에 여행을 가서 피우는 담배의 맛… 솔직히 아무리 끊었어도 저건…
정말 강원도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지금만큼 겨울을 좋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격은 똑같이 안 좋았을 테니 모를 일이기는 하다. 자연재해에 가까운 계절을 매년 겪었다면 이렇게 배부른 소리는 못했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역시 서울 사람은 늘 얄미운 방식으로 티가 난다.
어쨌든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의 겨울은 지금 고지를 향해 달리는 중이다.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드디어 건물 사이로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 한복판에서 코트 단추를 다 풀어헤치고 미친 사람처럼 우하하 웃을 수 있게 된다. 그날이 되면 바람 무슨 일이냐며 욕을 하겠지만 - 한 가지만 하지를 못하고 - 나는 안다. 슬슬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누구에게일지 모를 애원을 시작할 것이다. 조금만 더 겨울이면 안 될까요? 그러니 늘 그랬듯, 지금 할 일은 칼바람 앞에 나를 내던지고 이 계절을 즐기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