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일을 해야 쓸데없는 생각이 줄고 인생이 단순해진다는 진리를 믿으며 살아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내 인생은 더 단순해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수영을 배우며 깨달았다. 여기서 더 생각없이 살 수 있는 거였구나. 고민도, 근심 걱정도 없이 한 달이 일주일처럼 지나가버렸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스무 번도 안 되는 강습을 받았으니 자신감으로 따지자면 국가대표나 다름없다. 일단 수영의 놀라운 효능에 대해 무한으로 떠들 수 있다.
다양한 효능 중 압도적 1위는 생리통 경감이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지만 생리통만은 너무 심해서 삶의 질을 쭉쭉 떨어트리곤 했다. 유일하게 고통 받는 질병이었던 생리통이,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PMS는 없는 수준이다. 갑자기 벼락 같은 계시를 받고 썬칩 한 봉지 털어먹은 정도. 이 정도면 없는 거지.
나의 생리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 마약성 진통제를 하루에 10알씩 한 주기당 20알을 넘게 먹고도 고통스러웠는데 최근 두 번의 주기 동안 다 합쳐서 4알 밖에 안 먹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인생이 변한 수준이다. 물론 진짜 수영 자체의 효능인지는 모르겠다. 최근 강습 전날, 그러니까 일/화/목요일에는 술을 안 먹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수영하러 가야 하니까…
어쨌든 체력과 건강은 정말 중요하다는,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몸으로 깨달았다. 세상에는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봐야 아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다. 바보여서 그렇다기 보다는 스스로가 너무 똑똑하다는 착각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에는,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는 오만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혼자 늦게 깨달아 놓고 남들도 몰랐을 거라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그 깨달음에 대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는 게 그 증거다. 지금 수영 이야기를 백 번 천 번 하고 있는 나처럼…
두 번째 효능은 무한 도파민 공급이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에 가십이 어디 있고 도파민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영은 그걸 준다. 특히 1년에 한번씩 강사가 바뀌고 회원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다니는 이런 시립 수영장이라면 그깟 도파민쯤 무한으로 제공한다.
강습을 받기 시작한 뒤로 매번 수업 시작 20분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유아풀에서 대기했다. 8시까지만 가면 되는데 7시 40분까지 가는 짓을 왜 했는가? 가십을 즐기기 위해서다. 유아풀에 발만 담그고 걸터앉아 있으면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고인물’ 회원님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그럼 그걸 듣는다. 눈물 나게 재밌다. 가끔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물 속에 얼굴을 담근다. 꼬르륵.
또 옆 반 젊은 강사의 인기를 구경하는 재미도 빠트릴 수 없다. 임영웅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는 그 녀석은 애티튜드 자체가 슈퍼스타다. 트로트 가수 박현빈이 할머니 팬들이 많은 무대에 오를 때면 “애기들아 오빠 왔다~!” 라고 한다던데 거의 그 수준이다.
한번은 그 녀석이 생수병에 든 물을 어머니뻘 되는 회원님한테 쇽 뿌리는 게 아닌가… 내가 봤을 때는 등짝을 맞을 버르장머리 없는 짓인데 회원님들이 꺄르르 웃으시는 걸 보면 팬 서비스의 일종인 것 같다. 서로의 니즈가 맞는다면 제삼자가 끼어들 건 아니다. 그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얼굴을 담글 뿐이다. 꼬르륵. (너무너무 재밌다…)
그러던 ‘임영웅’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면? 소문을 듣자 하니 회원과 싸워서 센터에서 해고 당한 거라면? 집과 회사만 오가던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의 도파민이다. 더 자세한 소식은 조금 더 엿들어봐야 한다.
세 번째 효능은 새로운 만남이다. 어떤 뇌 과학자가 이렇게 말했던가. 최고의 자극은 인간에게서 온다고. 하지만 새로운 사람, 그러니까 새로운 자극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특히 이런 모임은 이래서 싫고 저런 모임은 저래서 극혐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수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르다.
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들처럼 정기적으로 얼굴을 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게다가 그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서로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그저 즐거운 활동만 함께 하면 된다니? 심지어 그게 물놀이라니 제가 월 6만 원으로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될까요?
오랜만에 만나는 새로운 자극들에 너무 들떠서 이미 우리 반 귀여운 아기 회원님, 나보다 무려 10살이 어린 그녀와 커피까지 마셨다. 90년대에 30살이었던 것처럼 ‘커피나 한 잔 하실까요’ 하는 촌스러운 데이트 신청을 감행했다. 주책바가지가 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수영 이야기를 할 친구가 너무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회원님들과 강습 중에 잠깐 한 마디씩 나누는 별거 아닌 이야기도 너무 즐거워서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그래봤자 요즘 어떤 드라마가 재밌다, 저 동작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정도의 내용인데도 그렇다. 그래서 수영 선생님한테 제일 많이 듣는 말은 “웃지 말고~”다. 웃지 말라니. 이렇게 즐거운데. 회사에서는 영 나오지 않는 웃음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막 새어나온다.
이렇게 깔깔대고 팔다리를 마구 움직이고 아침부터 물에 담궈졌다가 박박 샤워를 하고나서 출근을 한다. 아직 물이 떨어지는 수영가방을 들고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보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루가 너무 길다. 나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기분은 자리에 앉으면 금세 사라진다. 그 자리에는 상쾌함만 남고, 또 다음 수업이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밤에는 수영 유튜브를 본다. 내일도 수영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