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런 생각 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어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어요. 이거 하나가 정답이 아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들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 김태리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모든 이들이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도망칠 곳이 정말 한 군데도 없어서 벼랑 끝까지 내몰린 이들이 수도 없이 많죠. 하지만 ‘왜 ##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폭력일 때도 있으니까… 여기에서는 이 말에만 집중할게요.
자주는 아니지만 여행을 떠날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언제나 떠날 곳, 혹은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자고요. 그래서 김태리가 저 말을 했을 때 조금 놀랐어요. 배우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직업이고 김태리는 그중에서도 성공한, 주목 받는 젊은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도망칠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늘 전력을 다해 살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조차 의식적으로 몸의 힘을 빼는 순서를 거치지 않으면 다음날 온몸이 뻣뻣한 상태로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젊은 여성 배우가 자신의 일을 ‘직업’이라고 칭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올해 서른 세 살인 김태리가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태도와 웃음, 목소리와 연기로 사랑받게 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힘 빼기를 익혀왔을지 상상해보면 그닥 이해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한국의 20-30대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칠 수 있다’, ‘힘을 빼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병이 들고 마니까요. 또 그렇지 않으면 김태리의 말처럼 “계속할 수 없”으니까요. 도망칠 곳이 없다는 말, 니가 여기 아니면 어딜 가서, 나 아니면 누굴 만나서 살겠냐는 협박으로 여자들을 가두고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하지만 누구의 협박도 아닌 오로지 나의 의지로 최고의 성취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 김연아
그럴 때는 그냥 하면 된다고, 김연아가 말했어요. 일단은 거슬리는 모든 방해물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냥 하면 됩니다. ‘그냥 하는’ 집중력조차 재능의 일부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1990년에 태어난 한국 여자에게는 이것저것 핑계를 댈 여유도 달콤한 잡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습니다. 그럴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일하고 달려야 그나마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가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김연아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일에 야마가 돌면서… 나를 짜증나게 한 이놈을 어떻게 조져버릴까… 고민할 때, 조금이라도 덜 일하고 덜 책임지고 싶을 때,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버리는 스스로가 웃기다가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속상할 때, 언젠가는 굳이 더 애쓰지 않아도 노력만큼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 때.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를 지닌, 수백 수천 번의 ‘그냥 하자’라는 결심으로 누구보다 아름다운 점프를 할 수 있게 된 김연아를 생각하면서 작은 마음을 아주 조금 다스립니다. 일을 할 때, 생활을 꾸려갈 때, “혼자를 기르는 법”을 익힐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라는 김연아의 말은 큰 힘이 됩니다. 너무 힘주지 않고 모두를 의심하거나 과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해요. 최근 봤던 <파트너스 트랙>의 첫 장면이 떠오르네요. 여자들은 너무 많이 사과한다며, 앞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또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요.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고맙지 않을 땐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 김연아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비춰졌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싸가지 없다’고 욕도 많이 먹었죠. 지금이야 소인배들이 황제를 욕했구나 싶지만 그땐 나름 분개(ㅋㅋ) 했었어요. 아무튼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전 김연아의 이름을 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했다가는 팬레터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김태리와 김연아 이 두 90년생 백말띠 한국 여성은 본인의 영역에서 매우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렇게 얌전한 말로 쓰고 싶지도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완전 미치광이처럼 호들갑을 떨어버리고 싶어요!!!! 난리 주접을 누구보다 잘 보여줄 수 있고!!!!!!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만 써 둡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덤덤하게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으니까요. 또 한 명의 90년생 백말띠 한국 여성인 나는, 물론 김태리와 김연아처럼 엄청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두 사람의 말에서 아주 큰 힘을 얻습니다. 또 제가 얻은 힘이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문장으로 바뀌기를 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세 번째 문장처럼,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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