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이름이 붙은 과목을 좋아해본 적 없다. 통칭 ‘3사’라 불렸던 한국사, 근현대사, 세계사 과목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저 과목 시간만 되면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졸음을 참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곤 했다. (당시 반에서 제일 많이 졸았던 나와 내 친구는 담임의 조치에 의해 교탁 바로 앞 자리로 나란히 이동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거기에 앉아서도 각자 상모를 돌리는 꼴이 가관이었다고 한다.)

##여중, $$여고의 역사 교사들이 특별히 재미없는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그건 느껴졌다. 그들의 기량은 뛰어났다. 최소 수업 시간의 초반 15분 동안은 핵심을 짚었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곁들였으며, 교훈을 뽑아냈다. 그 뒤는 자느라 못 들었다. 그저 역사 교과서 속 수많은 연도, 인물, 단체, 사건 들이 참을 수 없이 지루하고 졸렸다. 나는 역사 과목을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친구들이 신기했고 그 친구들은 그냥 소설책 읽듯이 재미있는 이야기책이라고 생각해보라며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나는 그 친구들을 보며 ‘너희가 소설을 안 읽어서 그래’라고 생각했다. 자아가 비대한 청소년의 싸가지는 원래 이렇다.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소설을 많이 읽기는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다음 학기 교과서를 받으면 그날로 국어 교과서의 문학 지문을 다 읽는 어린이였다. 학습 만화와 <개미> 중에 고르래도 눈물을 삼키며 <개미>를 고르는 초등학생이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학생 때까지는 학교와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몸과 마음의 양식 모두를 골고루 섭취하려 노력했으나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자마자 ‘성인이니 맘대로 인생을 망치거라’의 세계로 돌입했다. 음식엔 편식이 없었으나 책은 편식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증이 다 뭐냐 술이 뭐가 중요하냐 싶지만 스무살 때는 그런 것이 중요했다. 대학 때 ‘중앙도서관에 있다’는 말은 곧 ‘800번대 서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도둑놈 심보 미쳤다 싶은 소리라는 걸 안다. 인생에 공짜란 없다는 것도 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자꾸 ‘진짜 없나요?’를 묻게 된다. 어쨌거나 계속 바닥에 드러누워 발버둥 친다고 세계사 연표가 뚜벅뚜벅 머리 속으로 걸어와줄 리 없다. 4살짜리였다면 ‘넌 거기 누워 있어 엄만 집에 갈 거야’라는 소리라도 들었겠지만 혼자 사는 집은 적막강산이다.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 책을 펼칠 수밖에.

몇십 년을 편식하다가 의젓한 척 책을 펼치겠다는 이유가 또 있다. 이제야 지금 이 시대가 역사의 한복판에 적힐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어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래한 말이라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고 출처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역사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시대란 것은 우리네 민중들에게 고통스러운 시대일 테니 - 우리의 일상도 평화롭고 행복할 땐 한 달이 하루 같이 느껴지지 않던가 - 저주인 건 맞다. 이 이야기를 2012년 대선 전에 들었는데, 그땐 ‘그래 우리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네…’라며 대충 맞장구쳤었다.

그때는 그래도 어떤 거대한 흐름과 우리 나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였다. 지금이야말로 저 저주가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 그때 저 말을 알려준 친구와 아주 살짝, 몹시 잠깐 삼각관계(?)에 휘말린 적이 있는데 그 저주가 긴 시간을 돌아 이제야 들어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국 속담 하나.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역시 옛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역사 앞의 개인이 무력하게 느껴질수록 역사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는 분명 고뇌하고 고통 받고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뭐라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할 테니까(아마도). 뛰어난 기량을 지닌 교사들이 입 앞까지 숟가락을 들이밀던 시절에 받아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서사 말고 현실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를 좀 알아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 지금 하듯이 - 그들과 우리를 어떻게 기록하는지도. 아직 알고 싶은 것과 알아야 할 것이 이렇게 많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저는 요즘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시리즈를 읽고 있습니다. 강준만 아저씨 책 고등학교 때 논술 준비하려면 꼭 읽어야 된다고 했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조금 읽다가 너무 재미 없어서 내던지고 진중권, 유홍준 아저씨 책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까 그야말로 악마의 재능입니다. 별 재미 없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어찌나 재미나게 써 놨는지 놀라울 따름. 아무튼 이외에도 시대 불문 장소 불문, 역사책 추천 받습니다.

[추천합니다😎]

오랜만의 추천합니다 코너네요. 이강소 개인전 <풍래수면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데요. 재능과 노력과 성실함이 만나면 이렇게 압도적인 퀄리티의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구나, 아니 진짜 너무 잘 그리는데… 그리고 오리 너무 귀엽다. 라는 감상을 공유합니다.

팔십이 넘은 대가에게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조금 얄밉기까지 했어요. 미술가인데 친구도 많(아 보이)고 사회성도 좋(아 보이)고 기획도 잘하고 판도 잘 깔고 또 조금 운도 좋(아 보이)고… 당연히 있었을 고민과 고뇌가 보이지 않을 만큼, 인생이 가뿐해 보일 만큼의 고수셨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작품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냥 눈물 흘리면서 항복 선언을 하고 절대 하지 않는 짓 - 미술관에서 도서 구매 - 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전시관 앞에서 상영하는 인터뷰 영상은 미리 보고 가세요. (링크) 지금 국현미에서 하고 있는 다른 전시도 다 좋으니까 시간을 넉넉하게 가지고 연휴 동안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진짜 오리 너무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