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에게 이것저것 콘텐츠 추천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영화나 책,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디즈니 플러스와 일본 애니메이션과 웹툰, 재미있는 트위터 계정이나 블로그도 추천해요. 타율이 좋았냐고 하면… 글쎄요, 일단 많이 집어던지니까 그중에 상대방의 취향에 맞는 것도 몇 개쯤은 있지 않았을까요.
수많은 추천 중 제일 힘들었던 건 대만 드라마 <상견니>입니다. 저만 해도 몇 번 하차 위기를 겪었으니까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인정해요. 한드도 미드도 영드도 심지어 일드도 아닌 대만 드라마… 저도 <상견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대만 드라마네요. 물론 4번 넘게 정주행했지만...
혹시 대만에 가보셨나요? 아이돌 해외투어 콘서트 때문에 갔던 9월의 대만은 태풍에 우기에 한여름 더위까지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 자리에 탄 대만 사람이 ‘1년 중 제일 날씨 안 좋을 때 왔다’며 안타까워 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대만조차 좋았습니다. 겨우 3일 정도 있었던 주제에 1년 살기 하고 싶다! 는 결론을 내버릴 만큼요. 최악이라는 3일이 이렇게 좋았다면 이보다 나은 1년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대만은 시끄러운데 차분했고 복잡한데 깔끔했고 더운데 쾌적했어요. 후덥지근한 날씨엔 누가 조금만 닿아도 벼락같은 짜증이 치솟잖아요. 그런데 대만은 덥고 습한 대신 남에게 덥석 몸을 갖다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답니다. 대체로 친절하되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키는 느낌이었어요. 이 정신적인 쾌적함이 30도를 훌쩍 넘고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도 버텨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겨우 3일을 있었던 사람의 말이니 너무 믿지는 마세요.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도, 쉽지 않은 날씨도 개인적으로는 잘 맞았다는 거죠.
그리고 몇년 뒤 <상견니>를 보았을 때, 나 이러려고 그때 대만이 그렇게 좋았던 걸까~ 저 청년들과 저 나라가 너무너무 좋아~~! 얘들아 사랑해~~~!!! 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대만에 한번도 안 가본 상태였다면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을지도 몰라요. 본격적으로 드라마 이야기 시작하기도 전에 이 난리를 치는 사람 좀 별로죠. 사실 <상견니>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자꾸 말을 빙빙 돌리게 되네요. 너무 좋아하는 친구를 소개하려니 더 부담되는 마음이라고 할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타임루프 로맨스 스릴러(?)물인데요.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다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럼 재미가 반감되니 여기서 줄거리를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상견니>는 후회에 대한 이야기예요.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돌리고, 또 돌리고, 또다시 돌아가고야 마는 이야기죠. <상견니>의 주인공들은 그 어떤 타임루프물의 등장인물보다 용감하고 정직합니다. 머리를 쓰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요. 그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맑은 용기를 마주하면 저 같은 사람들은 그저 속절없이 눈물만 흘리게 됩니다.
어떤 슬픔은 후회를 연료 삼아 더 오래 타오르기도 합니다. 후회하는 인간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사라지려던 슬픔도 다시 우리를 돌아봐요. 그래서 ‘후회는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그간 헤쳐온 온갖 고난을 무용지물로 만들 만큼 강하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상견니>의 주인공들은 그때의 아픔과 후회를 딛고 달립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아볼 바에야 한번 더 시간을 돌려 그를 만나기 위해서죠. 리쯔웨이, 왕취안성, 모쥔제, 황위쉬안 모두 이렇게 선하고 용감하고 힘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비 내리는 여름의 대만을 배경으로 싱그럽게 웃는, 달리는, 소리치고 노래하는 고등학생들…
좋은 이야기에는 대체로 후회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어요. 전진하던 인물이 사건과 맞닥뜨리고,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후회하다가 다시 전진하죠.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요. 저는 이야기 속 인물이 후회하는 그 순간을 아주 좋아합니다. 누군가 가장 강해지기 직전, 가장 여릴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거든요. 후회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을 계속해서 곱씹고 돌려보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아요. 우리는 정말 끝났고 그 시간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구나.
<라라랜드>에서 가장 슬픈 장면을 꼽으라면, 미아가 준비한 1인극이 끝났을 때 객석에서 벌떡 일어나 유난스럽게 기립박수를 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세바스찬의 회상 씬이 아닐까 해요.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불안해서 그랬다고, 헤어지기 싫다고 고백하는 구웅이 그랬고요. 너무너무 찌질하고 못났는데, 그때의 자신이 너무너무 찌질하고 못났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후회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슬픕니다. 그 슬픔을 견디고 나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새로운 길과 성장이라, 보는 저로서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말죠. 진짜 재미있는 부분은 그때부터 시작이거든요. 앗 그러고 보니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도 후회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이러다 후회할 만큼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다음 기회로 남겨둘게요.
다시 돌아와서, <상견니>에는 상실을 겪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등장합니다. 이 천윈루라는 친구의 용기는 그래서 더 대단하게 느껴지죠. 이제서야 객관적인 척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한창 <상견니>에 미쳐있을 땐 윈루가 나오기만 하면 숨도 못 쉬고 주룩주룩 울기만 했었다는 점을 알려드려요. 천윈루가 두려움에 울 때, 그러면서도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찢어진 심장 아직 다 안 붙었고요. 떠올리니까 또 마음이 아프네요.
아무튼 이런저런 상념 없이 스토리만 봐도 너무 재미있는 드라마니까요. 꼭 한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여름엔 <너목들>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상견니>예요. 여름뿐만이 아니죠. 용기가 부족할 때, 별거 아닌 일 앞에서 망설이는 날 볼 때,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날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궁금할 때, 그냥 잘 만든 웰메이드 드라마를 보고 싶을 때 <상견니>는 최고의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