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2024년은 쉬어가는 한 해로! 라고 말할 땐 정말 몰랐다. 쉬어가는 한 해는커녕 일하다 죽을 뻔함, 일하다 병 남, 일하다 헤어진 거 까먹음, 일하다 눈물 흘림, 일하다 세상 저주함, … 아무튼 원도 한도 없이 바쁘게 일한 한 해였다. 괜히 쉬어가니 어쩌니 하면서 사망 플래그를 세운 내 탓이다. 일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성과라도 좋았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완전 말도 안 나오게 망한 건 아니고 잔잔하게 허허 망했나?^^; 싶은 정도인데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해야지.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열여덟 살의 기억이 생생하듯 제일 열심히 일했던 2024년도 생생하겠지. 날이 갈수록 몇 년치가 묶여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개인사 속에서 이토록 강렬한 한 해가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과 사랑 모두 잃은 한 해가 있다니, 짧고 굵게 한번에 처치되어서 다행이야! 이제 질병과 고통과 눈물과 업무의 늪에서 한 발은 빼냈으니 빨리빨리 나머지 발도 끌고 나와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겠다. 한국인이니까.
작년에 세운 올해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링크). 운전면허 따기, 5kg 찌우기, 비문학 도서 많이 읽기. 면허는 무사히 땄고 몇 번 자랑한 것처럼 차도 사서 운전 잘 하고 다녔다. 파주 인쇄소랑 물류창고에 갈 때 가장 유용했다. 내년에는 놀러 다닐 때 유용하길. 5kg 찌우기는 확실히 실패했다. 1kg 쪘다. 이젠 그냥 지금이 내 건강 몸무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목표를 낮추지 말고 노력을 높여라’ 이런 말이 있던데 나는 멋지게 목표를 낮춘다. 비문학 도서 많이 읽기는 그래도 조금 해낸 것 같다. 인문/사회/역사/과학 분야의 책을 20권 정도 읽었다. 올해 시작한 프로젝트 덕분도 있다. 역시 어떤 일은 한 가지 측면으로만 측정할 수 없다. (’목표를 낮춰라’)
그리고 12월이 되었다. 갑자기 역사의 한 장면으로 끌려들어왔다. 연말까지 다 합쳐서 2024년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욕이라서 그냥 넘어갑니다.
원래는 이 다음에 독서 결산도 하고 올해의 OO도 뽑고 내년 목표도 세워야 하는데 1월로 미루기로 했다. 12월 한 달 동안 주말엔 시간이 없었다. 광화문도 가고 남태령도 갔다. 바로 지난 글에서 운동권 애비 어쩌고 했는데 그냥 내가 운동권이 되어버린 한 달이었다. 아니다 그냥 인생이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제주항공 사고 때문에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서 계속 돌아다녔다. 그냥 미친 사람처럼 걸어다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이 글을 쓰고 보내는 일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했다. 언제든 이 행위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으니 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에 대한 고민에 가까웠다. 세계가 이토록 고통으로 가득한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올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계획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본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기능으로 정의한 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으로 대표되는 불쾌한 감정들의 해소를 일컫는다. 그리고 해소란 때로 무책임한 일이다. 현실 속에 여전히 똬리를 튼 문제들을 모른 척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정치로부터 배제된 것들은 때로 금지된 울음, 난반사하는 정념이 되어 무대로 되돌아온다. 망각이 거부되고, 논쟁이 창설된다. 탄식과 애도, 비명이 도래한다. 이 모든 것은 남성적 질서의 반대편에 놓인 여성적 혼돈이자, 혼란한 삶의 진실 자체다.”
-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아침달, 91p.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현실에 자리한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는 것, 혼란과 혼돈과 슬픔을 ‘해소’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한번에, 하룻밤 사이에, 말 한 마디로 휙, 하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들이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므로.
느리고 고통스럽고 모든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움과 논쟁이 벌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이 지나면 2025년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다. 정말 이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질량이 있는 - 비록 5kg을 늘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 진짜 몸뚱이를 가지고 진짜 인생을 살고 있다. 오늘 자고 일어나면 내년도 진짜로 와 있을 것이다. 그럼 이 몸을 여기저기 보내고 걷고 눕히며 또 그 시간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Reality hits you hard bro다, 정말.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