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022년에 말이죠. 여러분 체리필터 좋아하시나요? 전 체리필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뷰렛, 자우림, 델리스파이스, 서태지, 크라잉넛을 더 좋아했죠. 엘르가든이나 그린데이보다는 후바스탱크, 린킨파크를 더 좋아했고요. (대충 뭔지 알겠죠?) 그런데도 체리필터가 펜타포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갑더라고요.
소식을 들은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계속 체리필터 노래를 들었는데 솔직히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릴 뻔 했답니다. <해피데이>를 들을 때마다 ‘스무 살 쯤에 요절할 천재’가 뭘까 궁금했던 기억이랑 <피아니시모>를 부르던 조유진의 표정 같은 게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요.
레트로인지 뉴트로인지가 유행이라고 난리들이잖아요. 레트로, 뉴트로 말할 때마다 머리 위로 쟁반 쾅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오래요. 제가 생각하는 향수는 저렇게 시끄러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하고, 침잠하고, 수렴하는 기분에 가까워요. 사춘기 특) 자의식 비대하다 못해 흘러 넘침 → 이거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말인 거 아시죠? 서로의 자의식이 폭발할 자리가 모자란 나머지 비좁은 중학교 교실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요.
체리필터 노래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에 저는 커다란 자의식에 푹 빠져 있느라고 바깥에서 남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었습니다. 거대한 물방울 안에 들어있는 거랑 똑같았어요. 실제로도 다 때려뿌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헤드셋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기도 했고요.
그땐 왜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는지 모르겠어요. 맨날 고스에서 신해철이 떠드는 거 들으면서 생각하고 수업 시간에 이상한 거 끄적이면서 생각하고 20세기 소년 같은 만화책 보면서 생각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봤자 엄청 쪼그만 생각이거나 혹은 너무 커서 뜬구름 잡는 생각이었을 텐데.
제가 진짜 그리워하는 게 바로 그 느낌입니다. 매일매일 너무 생생하고 현실이어서 “징그러운 일상”을 살다보면, 끔찍할 만큼 손에 잡히는 고민들만 하다보면 이 모든 4k 세상에서 한 겹 흐려지고 싶어져요. 그렇다고 진짜 다 내던지고 방에 틀어박혀서 쟈가쟝 밴드 음악 들으면서 만화책만 볼 수는 없으니까(일단 국민연금도 대출 이자도 내야 하고)… 그럴 때 옛 노래들을 듣습니다.
그럼 아주 잠시지만 그때의 뜬구름 잡는 느낌이 되살아나요. <오리 날다> 모창을 아주 잘했던,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중학교 친구의 얼굴도 떠오르고 그때 우리 교실에서 났던 이상한 냄새도 떠오르고 CDP로 서태지 5집, 6집을 듣던 기억도 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샀던 음반이랑 그걸 샀던 광화문 교보 핫트랙스도 선명해지죠. (제가 처음으로 샀던 음반은 델리스파이스 5집인데요, <고백>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묻힌 감이 있지만 이 앨범의 진짜 명곡은 <별빛속에>입니다. 진짜임.) 밴드 보겠다고 여기저기 공연 다니고, 페스티벌 다니고, 대절 버스 안에서 내신 문제집을 풀던 기억까지 줄줄이 딸려 나옵니다. 이러다 잘못하면 3일 정도 추팔에 빠지게 되니까 일단 미루어두고요.
많은 사람들의 음악 취향은 중학교 시절 들었던 음악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요. 대충 ‘젊은이’로 퉁쳐지는 대학생 때까지는 다양한 음악들을 즐기고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중학생 때의 취향으로 회귀한다고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면서 음원 사이트에서 한번도 안 들어본 장르와 뮤지션의 노래를 숙제처럼 듣게 됩니다. 20년째 자우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하지만 그것도 정신력이 받쳐줄 때의 일. 모든 게 버거우면 자꾸만 안락한 밴드뮤직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중학생이던 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가사들이 지금 들으니까 어찌나 심금을 울리는지 몰라요. 키치죠지는 시타 연주 같은 게 들려오는 딴 세상이 아니라 놀랍도록 산뜻한 도쿄의 부촌이고, 홍대 앞은 아주 적은 뮤지션과 아주 많은 술집, 더 많은 토사물이 있는 동네라는 걸 깨닫는 데는 10년이 채 안 걸렸습니다. 하지만 불현듯 옛 노래 가사가 온몸으로 이해되는 순간, 내가 과거에 남겨두고 왔다고 믿었던 밴드가 사실은 15년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오래 잊고 있었던 노래를 다른 신인 밴드의 신곡을 들으며 떠올리게 되는 순간 같은 건 앞으로도 계속 제 인생을 찾아오겠죠. 아마 30년 정도는 더 걸릴 겁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그냥 펜타포트에 체리필터가 온다는 (정확히는 오늘 왔대요! “늙어서 못 노는 게 아니라 안 놀아서 늙는 거”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하고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후다닥 이것저것 이야기해봤습니다. 뷰렛은 제가 정말 좋아했고 공연도 많이 따라다녔던 밴드인데요, 2019년 지역 공연에 섰더라고요. 베이스 치는 언니 웃는 게 참 예뻤는데 여전하시네요. 한번 들어보세요. 내일도 힘내시고요.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