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번씩은 집에서 일을 합니다. 어쩌다 하루쯤은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캠핑을 가거나 호캉스를 떠나는 느낌…이라기엔 어차피 일하는 거네요. 아무튼, 혼자 살다 보니 재택을 하는 날에는 대면으로 한 마디도 말을 안 합니다. 밖에 나가서 뭘 사먹는 것도 아니니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조차 안 하고요. 혼자 일을 하고, 밥도 챙겨 먹고, 가끔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침대로 퇴근해서 조금 놀다가 잠들죠. 이런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와 오늘 사람을 한 명도 안 만났네. 한 마디도 안 했네. 너무 좋네…
재택 이후 약속 없는 주말까지 이어지면 묵언의 날은 더 길어집니다. 주말엔 화상회의도 없고 친구와도 가족과도 통화는 잘 하지 않고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음악도 안 틀어 놓으니까 집안이 침묵 그 자체입니다. (너무 좋아) 며칠 뒤 밖에 나와서 버스를 타며 무심코 인사를 하면 잠깐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이거 며칠 만에 말하는 거지?
본가도 회사도 서울이지만 굳이 집을 나온 이유 중 하나도 이겁니다. 말하기 싫어서. 집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상대가 말을 걸 때 대답해야 하잖아요. 그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는 언제나 갑자기 툭 시작됩니다. 던져진 말을 받아내지 않을 권리가 저에게는 없고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갑자기 서브되는 공을 언제나 받아야 한다는 것, 그 무제한 서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겠죠. 늘 못 견디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그때의 저는 그걸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약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냥 싸가지가 없었거나…
혼자 여행을 가면 좋은 이유도 똑같습니다. 말을 안 해도 되는 게 너무 좋아요.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묻더군요. “그럼 뭐가 너무 맛있거나 경치가 너무 좋으면 어떡해?” 바로 그럴 때 쓸데없이 말 할 필요 없이, 한 마디도 안 하고 혼자 속으로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게 혼자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인데 말이죠.
쭉 늘어놓고 보니 책임은 싫고 쾌락만 누리고 싶다는 이야기네요. 원치 않는 서브는 차단하지만 나는 회사 사람들한테 말 시키고 싶으니 출근하겠다는 소리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데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뻔뻔 레전드? 하지만 진심입니다. 가능한 한 혼자인 시간을 확보하고, 수도사처럼 대침묵을 즐기고, 밖에서는 많이 이야기하세요. 이걸 거꾸로 하면 사람이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현대사회의 현대인인 우리는 불필요한 소음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필요한 대화는 빼앗깁니다. 생각할 시간은 없고 말해야 하는 순간들만 계속 닥쳐오죠.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또) 다녀왔습니다. ‘사유의 방’이 생긴 뒤로는 다른 거 하나도 못 봐도 사유의 방은 꼭 들어가 보는데요. 왜 그 공간에 자꾸 가고 싶은지 생각해봤습니다. 잘 설계된 공간 자체가 주는 쾌감도 물론 크죠. 이 조각상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계산된 형태, 조도, 동선, 소리, … 만든 사람의 의도에 온몸을 맡기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쾌적함과 ‘하 이거지’ 싶은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다 조용히 반가사유상 주위를 크고 느리게 돌거든요.
또 하나는 두 반가사유상이 주는 차분함과 안도입니다. 언젠가 무한도전에 출연한 김혜자 배우가 아프리카에 가면 내가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사유의 방에 들어가면 그 비슷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비슷하지만 ‘인간은 다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구나’ 하는 체념에 가까워요. 누구나 두 반가사유상을 보면 그 섬세한 조각상에 자신의 고민을 투영할 겁니다. 주위를 크게 돌며, 360도 도는 동안 커졌다 작아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미륵보살을 보며, 그러다 문득 깨닫는 거죠. 다들 똑같겠구나. 인간은 언제나 이런 상을 만들고 천 년이 훌쩍 지날 때까지 같은 조각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