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이후로 저의 집중력 그래프는 꾸준히 우하향하고 있습니다. 뭔가에 제일 몰입할 수 있었던 시기는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고등학교 땐 순간 집중력은 좋았던 것 같은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래 뭔갈 하기는 어려웠던 기억이 나거든요. 10대 초중반에는 책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두세 시간이 지나 있고, 문제집 풀다가 고개를 들면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잔머리가 급격히 늘어 ‘쉬는 시간 10분 안에 단어 100개 외우기’ 이런 재주를 부리는 쪽으로만 발전해버렸어요.
그리고 스무 살… 과도한 음주가 뇌세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모두 잘 알고 계시겠죠. 대학 땐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적이 잘 없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술을 마시면서 sns를 하고, 수업을 들으면서 잡지 마감을 했어요. 결국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몰입한 건 여러 관계들뿐입니다. 그래서 대학 생활을 돌아보면 남은 건 폐허(?) 그리고 친구들…
회사에 들어간 뒤로는 한동안 바짝 집중력을 끌어다 썼습니다. 글 쓰는 일만 했으니까 당연했으려나요. 하루에 열 몇 페이지씩, 정해진 양을 지키지 못하면 마감을 맞출 수 없었고요. 이 집중력 대출은 3년을 못 갔습니다. 손목이 아작나고 어깨가 무너지고 허리가 아파오면서 정신머리도 허물어졌으니 역시 몸은 마음의 그릇이고 체력 없는 정신력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죠.
또 몇 년 뒤에는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는데, 저는 아직도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파티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자가 훨씬 좋습니다… 처음 이직한 회사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광활하게 펼쳐진 테이블과 그 위로 널부러진 노트북들에 경악한 기억이 생생해요. 이게… 사무실? 이 끝에서 저 끝의 사람과 눈이 마주칠 수 있는 곳이…? 아무리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내가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 뒤로 약 6년 동안 저는 다시는 파티션이 있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파티션과 세월과 집중력이여.
너무 뻔하고 쉬운 핑계지만 진짜로, 뻥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 회사에서의 집중력은 파티션을 잃은 그 순간 함께 날아간 것 같습니다. 어쩌다 회사가 쉬는 날 사무실에 나가면 조용히 혼자 집중하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마치 안락한 파티션이 저를 감쌌던 과거의 그때처럼…
아무튼 언제까지 파티션 탓만 할 수는 없으니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특히 정해진 업무량이 있고 그걸 쳐내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무겁기만 한 맷돌을 굴리고 굴려서 고민하고 뭔가를 생각해내고 어쩌고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는 얼마나 집중해서 머리를 쓰느냐에 따라 효율이 너무 갈리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이런 저런 방식을 시도해보는 중입니다. 이왕 하는 일 잘하고 싶으니까요. 가끔 ‘꼭 잘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30년 넘게 이렇게 살았는데 이 성질이 쉽게 바뀌진 않겠죠.
우선 일상에서 몰입하는 연습을 다시 해보고 있습니다. 원래 있었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라는 마음을 이겨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현실 직시, 메타 인지… 이런 이야기 말로는 쉽지만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지…
책을 읽을 땐 음악을 듣지 않고, 밥을 먹을 때 영상을 틀어 놓는 건 어쩔 수 없지만(그래야 얼떨결에 한 입이라도 더 먹게 됩니다) sns는 쳐다보지 않고, 일기를 쓸 땐 중간에 딴 짓 없이 10분을 연달아 씁니다. 지금 제 상태에서는 10분 동안 일기 쓰기도 은근히 쉽지 않더라고요. 달랑 20분짜리지만 요가도 열심히 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몸을 움직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거든요.
회사에서도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연습을 합니다. 요즘의 집중력 저하에는 안일함도 한몫 했던 것 같아요. 이 정도 짬이면 ‘일하는 법’을 안다는 자만이죠. 하지만 어림없지, 저는 그렇게 잘나지 않았고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다시 할 일을 쪼개고, 4살 어린이보다 못할 게 분명한 저의 작고 소중한 집중력으로도 한 흐름에 다 해낼 수 있을 만큼으로 또 쪼개서 스스로에게 작은 목표를 던져줍니다. 자 봐봐…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집중해서 끝내봐… 그럼 라운지에 물 뜨러 한번 갔다 올 수 있어… 다 했으면 이것도 좀 해봐… 이거까지 하고 카톡 확인 한번 하자… 이쯤 되면 진짜 비위 맞추기 징그럽다 싶고 현타도 오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게 평생 같이 살아야 할 저인 걸요. (오늘 어쩌겠냐는 말 너무 많이 하죠?)
이 연습은 꽤 효과가 있습니다. 해낸 일의 크기에 비해 효능감이 커서 빠르게 선순환에 올라탈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내 인생과 일과 일상을 더 효과적으로 컨트롤한다는 느낌이 저 같은 컨트롤프릭 싹퉁바가지에게 아주 딱~ 맞습니다^^ 지금까지 막 살아놓고 말은 잘하죠?
다음주부터는 회사에서 더 집중해서 일도 열심히 하고, 간만에 혼.놀을 즐겨볼까 합니다. 물론 오늘도 하루 종일 혼자 놀았지만 집에서 노는 거 말고, 오랜만에 전시도 보고 영화관도 가고 싶어요. 혼자 마음 속으로 ‘와 이 그림 미쳤음’ ‘와 이거 너무 맛있음’ 하면서 호들갑 떨면 또 그만큼 충만하게 몰입할 수 있는 때가 없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면 월요일도 나름… 조금은… 기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이 유행이더라고요. 물론 저는 안 읽었지만 제 집중력도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게 확실합니다. 누군진 몰라도 돌려달라고 하고 싶네요. 안 돌려준다면 별 수 없죠. 다시 처음부터 제 손으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계속 쌓고 또 쓸려갔다가 다시 쌓고 누군가 그걸 부수고 지나가도 다시 한번 쌓아봐야 할 겁니다. 아무튼 부둣가에서 새우깡 얻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갈매기처럼, 혹은 그보다 더 지독하게 앞으로 나아가봐요. “인생은 마치 끝없는 궤도를 달리는 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