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호퍼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그냥 그랬어요. 애초에 큰 기대 없이 갔기 때문에 엄청나게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볼 시립미술관의 정원과 천경자 상설관, 진주회관 콩국수 같은 게 더 기대됐고요. 호기심은 약간 있었습니다. 그림에서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외로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흔하고 사람들은 종종 외로움 때문에 미치거나 사랑하거나 씩씩하게 나아가기도 하죠. 저는 모릅니다. 심심함도 아니고 슬픔도 공허도 고독도 아니라는데, 대체 외로움이라는 건 뭘까요? 경험해본 감정 중 가장 외로움과 가까웠던 건 여름에 점프수트를 입고 공중화장실에 갔을 때의 기분입니다. 아주 사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반쯤 깨벗고 있을 때 느낀 그 기분이 잠시였지만 외로움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런 천도 나를 감싸주지 않아… 물론 외로움을 토로하는 친구 앞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가 욕 많이 먹었습니다.
어쨌든 호퍼는 도시 속 현대인의 외로움을 그려낸 화가라고들 하니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느껴본 적은 없더라도, 대가의 그림 속에서 그 감정을 엿볼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작품을 보면 볼수록 의심만 들었어요. 그냥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외로움을 모르는 얄팍한 사람이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려낸 풍경은 가짜 외로움이다. 그냥 고독하고 고요한 풍경을 그렸다고 해서 거기 외로움이 담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의 단절만 보이는 그 그림들 안에서 은근한 우월감까지 느껴졌다고 하면 너무 개인적인 악감정이 섞인 평가겠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안 할 것처럼 해놓고 남 욕 다 하기). 카페테리아에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 테라스에 걸터앉은 나이차 많은 커플을 볼 때, 동트는 새벽 창 밖을 내다보는 여자를 그릴 때 화가는 그 안에 아무것도 담아주지 않습니다. 풍선을 빵빵하게 불듯이 공허를 가득 채웁니다. 수행에 가까운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 아니라 그냥 껍데기를 그려놓은 느낌이죠. 한마디로 ‘너 혹시... 뭐 돼?’만 묻게 됩니다.
물론 저는 특정 분야에서 부정할 수 없는 근본주의자(꼰대)이기 때문에 호퍼의 아티클과 선언문에 삐죽대며 동의합니다. 어쨌든 음악은 뿅뿅댈 게 아니라 물리적 악기로 공기를 진동시켜 그 소리를 귀에 닿게 해야 하는 것... 자고로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래저래 해석하여 담아내야 하는 것... 이런 수준의 취향인 덕분에 '회화란 말이야~ 풍경을 보고 해석을 해서 그려내야지~ 추상표현주의 그 녀석들은 영~' 하는 말에 은근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말죠.
하지만 그 노인이 단호하고 꾸준하게 비판한 추상이 오히려 그가 담아냈다고들 하는 고독이니 외로움 같은 것들을 더 잘 알려준다고 믿습니다. 작품 앞에 서면 작품보다 작가가 더 잘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작품은 자의식에 짓눌려서 바로 눈을 돌리게 되거나 오히려 너무 흥미로워서 목이 빠져라 들여다보게 됩니다. 상처 위에 앉은 딱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듯이… 그게 호퍼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겁니다. 결국 외로움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갔지만 싫은 것만 잔뜩 늘려왔다는 이야기에요.
깜악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알아, 너의 외로움 (…) / 외외외 외외외로운 것이 외외외 외외외로운 거지 / 둘이 되면 두 배가 돼버리는 / 둘이되면 세 배가 세 배가 되는 외로움” (눈뜨고 코베인,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
이 곡에 따르면 외로움은 둘이 되면 두 배, 세 배로 커집니다. 심지어 “여섯 배가 될 지도 모르겠”고, “여덟 배가 돼버릴지도 모”릅니다. 노래는 결국 외로움이 “아홉 배가 되면 어떡”하냐며, 하지만 그래도 “외외외 외외외로운 것이 외외외 외외외로운 거지”라며 끝나는데, 그래서 둘이 됐을 때 외로움이 몇 배가 될 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 더 외롭기 쉽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호퍼는 곁에 있는 사람을 죽도록 외롭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 특유의 무심함과 오만함이 그림에서 보입니다. 그 그림에 아주 언뜻이라도 진짜 외로움이랄 게 담겼다면 그건 옆 사람의 혹은 캔버스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외로움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와 묻은 잔해일 거예요. 예리한 화가의 눈에 포착되었지만 재구성 과정에서 미처 해석되지 못한.
열심히 욕을 했지만 결국 누워서 침을 뱉은 셈입니다. 저는 누군가 외로움을 호소할 때만 간접적으로 그 마음을 봅니다. 외로움은 늘 전우주적인 감각일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천지간에 혼자 있는 것 같을 때 외롭다고 하니까요. 오래 알아온 사람이나 아주 예민한 사람만 알아차릴 만큼 예민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데도 이 전우주적 감각만이 나를 빗겨간다는 것. 그 덕분에 스스로가 얼마나 낙관적이고 무뚝뚝하고 그릇이 작은지 알 수 있습니다. 전우주적 감정? 내가 그런 걸 느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소통과 공감? 그런 게 세상에 있나? 낙관은 기대 없음에서 온다…
외로움을 토로했던, 특히 네가 옆에 있어서 더 외롭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당연히 그들은 저를 떠났고 전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동태눈깔이 된 남자 아이돌처럼 “아 진짜?”만 반복할 거라면 아예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외로움이 뭔지 모르고 알지 못하는 감정을 위로할 능력이 없거든요. 물론 핑계입니다. 세상만사를 다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각자의 외로움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어떤 이유에서 어떤 마음 때문에 생겨난 외로움인지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죠. 더 거칠게 말하자면 그냥 귀찮아서 외면하는 겁니다. 그래 너 참 외롭구나 화이팅, 하고 눈을 돌리고 싶어서요.
언젠가 문득 외로워지는 순간이 오면 아주 조심스럽게 그 마음을 기록해두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순간 아주 높은 확률로 “와 이거였네” 하면서 벌떡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힘들게 찾아와준 그 전우주적 감정은 진절머리를 내며 사라지고 말겠죠… 이딴 놈한테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혀를 차며…
세상은 넓고 마음은 다양해서 나랑 같이 몇십 년을 살았어도 아직 새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더럽고 작고 치사한 마음들,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느끼게 해주는 관대함들을 가끔씩 처음 만나요. 그래서 언젠가 꼭 외로움도 나를 찾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 꼭 호들갑 떨지 않고 조심할게요. 그럼 다음날부터는 외로운 친구들을 위로할 수 있고, “너 때문에 더 외로워” 같은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설레고 기대하는 것부터 좀 망한 것 같기는 한데 또 모르죠. 인생은 예측불허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