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중에서도 케이팝 아이돌 덕질을요. 저는 2017년까지 아이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유행하는 케이팝을 듣기는 했지만 어떤 그룹이, 어떤 멤버가 좋아서 덕질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곧 말씀드리겠지만 이것도 무지의 소치였던 것이 덕질은 생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처럼 인생의 한복판에 메다꽂히며… 혹은 점지되며 시작됩니다.
때는 2017년, 국민 프로듀서 대표 보아가 ”당신의 소년에게 투표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날리는 꽃가루 사이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청년들이 괴상하게 허우적대는 걸 봤을 때(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춤이 초딩 때 배운 <짜라빠빠>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게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년’들은 같은 프로그램의 이전 시즌에 출연했던 여자 연습생들과 외모 차이가 너무 났고 그 가사의 자신감이 너무 싫었고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얻는 게 무엇이며 등등 욕할 수 있는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때 다니던 회사의 동료는 저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조심해요. 싫어하는 마음도 감정이라서 그 마음이 너무 커지다가 그 대상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 동료는 당시 주는 거 없이 얄미운 한 랩퍼를 욕하다 못해 좋아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도 자신이 겪었던 그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했고 그 예언-저주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욕하기 위해 챙겨보던 그 프로그램에서 저도 기어코 발견하고야 만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게 아니라 케이팝의 신에게 발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응 그렇게 욕하더니 너도 한번 당해봐~
‘케이-팝’이라는 말과 아이돌 덕질 사이에는 아주 큰 공동이 있습니다. 일단 돌덕질에는 그 어떤 글로벌도 없죠. 다음카페와 인터파크와 yes24 티켓 서버와 등촌동 일산 여의도와 잠실, 고척이 있을 뿐입니다.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가요? ‘빠순이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말로 요약되는, 무제한 대기와 취소와 번복과 무질서로 가득합니다. 아이돌 덕질 중 아주 약간의 질서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며 곧장 파괴되기 위해 발생한 찰나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팬들은 그 안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며 보조배터리에 의지한 채 길고 긴 대기 시간을 견뎌냅니다. 결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그곳을 떠나죠. 이건 아주 성공적인 경우만을 이야기한 것이고 대부분은 그토록 사랑하는 ‘최애’를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렵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아이돌 덕질은 한국만의 민속문화라고 해도 됩니다. 그곳을 떠도는 감정들도 매우 한국적입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한’이라는 단어가 생생한 현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팬들은 덕질을 하다가 ‘한을 처먹’고, 또 재미있게도 그렇게 한을 먹이는 아이돌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위험하지는 않은 수준의 자해가 더 큰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사면서요.
저는 그런 덕질 문화를 보면서 세상에는 별 일이 다 벌어지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장 슬픈 점은 스스로가 그 별 일들 속에 풍덩 뛰어든 상태라는 겁니다. 한국에서 아이돌 덕질을 한다는 것은 (특히 오프를 뛴다-직접 현장으로(?) 가서 살아 움직이는 아이돌을 내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온갖 기괴한 인간 군상을 본다는 뜻이며 ‘일처리’, ‘일머리’ 등 일을 잘 하는 능력이란 대체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각종 기괴한 인간 군상에 대해서는 <남팬 만화>라는 명작에 매우 자세하게,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생생하게 나와 있어서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조금만 더 정신을 놓았다가는 큰일이 날 뻔한 시점까지 갔었는데 함께 덕질을 했던 친구 덕분에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심연과 함께한 나머지 저까지 심연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
얼레벌레 일 처리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죠. 팬들은 늘 궁금해합니다. 기꺼이 돈을 바치겠다고 울부짖는 몇천 몇만 명이 줄을 서 있는데 대체 왜 이 돈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 끝없는 굿즈 줄만 세 줄로 나누어 서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걷어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역시 수많은 좋소기업들 중 하나일 뿐이라 적은 인력과 낮은 임금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내려다 보니 벌어진 일들이죠.
아무튼 한번 뛰어든 일이니 최고로 열심히 했습니다. 원래 표값의 8~20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암표를 샀습니다. 몇만 명이 한번에 시도하는 선착순 댓글 달기에서 20번 넘게 100등 안에 들었습니다(사녹 신청을 한번이라도 해보셨다면 이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 아실 텐데). 여행을 간 김에 콘서트를 보는 게 아니라 콘서트를 보려고 해외에 갔고,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27시간 노숙을 했고, 팬미팅에 당첨되려고 맛없는 과자를 몇 박스씩 샀고,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선배의 아버지의 친구한테 부탁해서 초대권을 구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스포츠였어요. 그 경기에서 승리하면 ‘이번 경기 난이도 오졌지만 이렇게 좋은 기록-자리-으로 통과했다’는 기록과 함께 부상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최애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셀 수 없는 시간과 수천만 원을 멋지게 하늘로 쏘아올렸습니다.
아이돌 덕질은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며, 인간 취급도 못 받고 내 최애를 볼 날은 요원한데 이 짓을 왜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이 늘 머리 속을 맴도는 일입니다. 현타와 환희가 계속해서 번갈아 뇌리를 때리는 일입니다. 대체 그때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갔을까요? 저의 온몸과 정신에서 나와서 길바닥에 흩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뭔가 집중하고 열광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온몸의 에네르기를 모아서 허공에 쏴버리기... 그건 어딘지 시원하고 개운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오래 참았다가 화장실에 간 것처럼(?). 그 전까지 대체 뭘 참고 살았다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돈은 돈대로 어마어마하게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엄청나게 날렸지만 또 그때만큼 자극적으로 행복했던 때가 없습니다. 잔잔한 만족감이 충만한 행복이 아니라 뇌에 바로 전극 꽂은 거 같은 그런 자극입니다. 요즘엔 이런 걸 도파민 샤워라고 하던데 그땐 그런 말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오로지 자극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만 그 모든 걸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왜 그랬을까요?
솔직히 그때 제가 좋아했던 그룹이 엄청난 퀄리티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 퍼포먼스와 퍼포머를 사랑했고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지를 잔뜩 끼고 귀걸이와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한껏 반짝이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매우 촘촘한 기준으로 잘게 나누어서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좋아했으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저는 말 그대로 우상화된 존재의 어떤 부분을 선택하고 거기에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였어요. ‘최애’가 너무 좋다면서 난리를 치다가도 정작 일대일로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그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싸인회 같은 행사에 행여나 당첨된다고 생각하면 머리털이 쭈뼛 섰거든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상황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팬 싸인회 응모권을 준다는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 나도 몰라네요.
하지만 분명, 다량의 도파민과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중인 티켓팅 재주 외에 얻은 게 또 있긴 합니다. 마음의 상한을 알게 됐거든요. 내 심장이 얼만큼을 감당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각각의 심장마다 버텨낼 수 있는 최대 심박수가 있는 것처럼 각각의 마음에도 커질 수 있는 상한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풍선은 멜론만큼 커질 수 있고 어떤 풍선은 7킬로그램짜리 수박만큼 커질 수 있죠. 저는 제 마음의 크기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알았고 (그리고 매일 그 크기를 늘려가는 연습을 했고) 그래서 거기까지는 안심하고 전력질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원래 겁이 많았지만 거듭되는 훈련으로 마음을 키우고 고백하고 쏟는 일에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때 사랑했던 아이돌도 다 늦게 만난, 색다른 종류의 운동을 알려준 트레이너였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최애’는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춤을 추고, 저는 한 뼘 더 강한 심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이 있고 그들은 매일 인터벌 트레이닝에 단련되고 있을 겁니다. 덕질이라는 행위가 이렇게 “사랑의 전문가”들을 키워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핑계로 수많은 허술함에 슬쩍 눈 감는 게 맞는 일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