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를 처음 본 건 98년입니다. SBS에서 방영한 TV애니메이션이었죠. 너무 어렸을 때라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오프닝에서 기찻길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인천(?) 같은 지역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네요. 또 박상민 아저씨가 부른 오프닝 노래가 아주 유명하죠. 이 TV판이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기는 한데 퀄리티가 별로라 다시 볼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만화책 대여점을 매일같이 드나들기 시작한 중학교 때, 드디어 만화책으로 슬램덩크를 봤습니다. 우선 작화 퀄리티가 엄청나서 놀랐고 다음으로는 이렇게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다들 너무 매력적이어서 놀랐어요. 슬램덩크 이후로는 이런 ‘열혈’ ‘스포츠’ 만화를 잘 보지 않았는데 어떤 작품을 봐도 다 슬램덩크의 아류처럼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H2 같은 건 논외로 하고요.)
98년의 첫 만남을 기준으로 하자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햇수로 25년 만의 재회입니다. 중학교 때 본 만화책을 기준으로 해도 20년 만이네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아득해요. 하지만 슬램덩크 극장판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건 무조건 봐야지’ 했어요. 해리포터가 영화로 개봉했을 때 ‘당연히’ 보러 갔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죠. 그리고 냅다 눈물을 좔좔 흘릴 걸 알았기 때문에 여분의 마스크도 준비하고, 티슈도 준비하고, 애플워치는 빼놓고 갔답니다. <탑 건: 매버릭>을 볼 때 심박수가 130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주의 알람이 떴었거든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북산 스타팅 멤버들이 살아 움직이는 오프닝에서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도 40대 아저씨 같아서 꾹 참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영화 초반은 살아 움직이는 산왕전을 보고 있다는 충격에 후루룩 지나가고, 중후반부로 달려갈 때가 되어서야 인물과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더빙판으로 한번 더 봐야겠죠?)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입니다. 제 기억 속의 송태섭은 조그맣고 드리블 재간이 좋은, 한나를 좋아하는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딱히 인상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어떤 팀에나 있는 적당히 균형 잡힌 인물이라고 할까요? 실제로 개인 서사가 그렇게 많이 공개된 편이 아니라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 송태섭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정식으로 밝혀진 건 단편 <피어스> 이후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송태섭의 상실과 극복, 되찾은 자신감과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더 넓게 보자면 ‘자리’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죠. 북산 농구팀 안에서 송태섭의 자리position는 포인트가드입니다. 가족 안에서 송태섭의 자리는 (사실상 첫째 역할을 하는) 둘째 아들이죠.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원하고, 능력으로 그것을 증명하기를 원합니다. 송태섭도 마찬가지예요. 넘버원 가드가 되고 싶고, 엄마에게 나 자체로 충분한 아들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산왕의 벽은 높고 엄마의 상실감은 깊어서 송태섭의 키로는, 그의 존재감과 능력만으로는 그 자리를 지키고 증명하는 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송태섭의 포지션은 유난히 많이 가로막힙니다. 본인의 포지션에 맞는 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돌파해야 하는 장애물이 너무 많아요. 산왕의 거대한 선수들은 초등학생 때 1:1로 맞붙었던 형, 또 중학생 때 잠시 마주했던 정대만만큼이나 큰 벽입니다. 형의 어린 시절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보는 엄마의 등은 송태섭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가족이라는 집단, 또 팀 플레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의 ‘자리’란 어떤 의미일까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무사히 해내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죠. 가끔은 증명하지 않아도 그의 자리를, 그에게 쏟는 마음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관계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로 다져진 팀, 사랑으로 연결된 가족이 그렇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팀도 가족도 우리에게 백 퍼센트의 위로를 주지 못하기에 스포츠 만화는 우리에게 판타지적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안에서 서태웅의 패스와 송태섭의 편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패스와 편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올린 신뢰가 결국은 아름다운 결말을 향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거든요. 저는 송태섭이 형 몫의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를 홀랑 집어 먹을 때 이미 그가 형의 부재와 화해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으로 떨릴 때마다,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에 긴장될 때마다 주머니에 넣어 감추던 손을 밖으로 빼고 쫙 펼쳐서 손바닥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요.
결국 송태섭은 자신의 자리를 찾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형을 지나쳐 걸어가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위로합니다. 산왕의 프레스를 돌파하고 팀원들에게 공을 패스합니다. 키가 작아도, 슈팅 능력이 떨어져도, 영원히 형보다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없어도, 결국 나이를 먹고 성장하고 노력할 수 있는 건 지금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죠.
천재적인 재능으로, 굴곡 없는 가정사와 쏟아지는 관심과 사랑으로 자연히 주어지는 포지션을 얻고 그 안에서 마음껏 자신의 롤을 수행하는 이들이 있을까요? 다들 토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성장합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정우성의 후반 10분을 보세요.) 온 힘을 다해 잘난척을 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렸던 상만큼 훌쩍 자라나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그중에서도 송태섭은 가장 극적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본인의 포지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포지션을, 또 그 다음 자리를 찾아요. 어렸던 형이 꾼 꿈을 이루고 그 위에 자신만의 꿈을 계속해서 쌓아 나갑니다. 그건 송태섭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넘버원 가드’이며, 또 슬램덩크가 이처럼 강렬한 인물들로 가득한 뜨거운 성장 서사인 덕분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