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긴데 장기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라는 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인생 짧으니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도 있다. 나에게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인생 길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러니 장기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안 나온다. 오히려 인생 기니까 너무 길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인생이 길다는 생각은 대체로 지겨움과 안일함, 안도를 가져온다. 밤새 공부나 과제를 하겠다고 결심하면 갑자기 남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밤은 무한히 길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면 자연히 안일하고 방만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고 계획은 필연적으로 망해버린다.
인생은 길다. 너무 길어서 아무리 쪼개고 쪼개도 더 쪼갤 수 있고, 쪼갠 틈 사이로 뭔가를 계속 쑤셔넣을 수 있다. 병 속에 큰 돌덩이를 넣고 그 뒤에 돌멩이를 넣고 그 뒤에 자갈, 모래, 물을 차례로 더 넣을 수 있는 것처럼. 그 촘촘한 선들을 한 칸씩 건너다보면 하루하루가 자꾸만 더 길어진다. 요즘은 인생이 너무 길어서 고되다. 이건 바쁜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잠시도 쉴 틈 없이 다음엔 뭘 하고, 그 다음엔 뭘 하고, 여기까지만 하고 잠을 자야 내일 또 일찍 일어나서 이 모든 것들을 처리할 수 있고…
세 사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전업 주부, 직장인, 예체능에 미친 초등학생. 그러니까 회사에 다니면서 집안일도 해내고 수영과 장구를 배우면서 잘하고 싶으니까 따로 연습도 하고 책을 읽고 그러다보면 책을 내고 싶기도 하니까 글도 쓰고 밥도 해먹고 인터넷도 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독서 모임도 가야 하고 그러려면 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 늘 그렇듯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아니, 이것은 정말 재앙인가? 나의 인생을 재앙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사실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한데.
하루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웃음이 난다. 오늘도 너무 즐거웠다, 이렇게 알찰 수가 없다, 나 자신 대단…(하다가 잠들어버림) 하루를 시작하려고 집 밖으로 나오면 또 기분이 좋다. 하루에 하나씩은 꼭 즐거운 일이 생길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히 생기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스스로 만들어준다.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아도 되고, 아니면 혼자 도시락을 까먹으며 책을 읽는 여유를 즐겨도 된다. 맛있는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사먹어도 되고, 퇴근한 뒤에 아껴놓은 <냉부> 최신회차를 봐도 된다. 이도저도 여의치 않으면 샌드위치를 하나 만들어 먹으면서 - 자꾸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 리디 내 서재를 뒤져 만화책을 골라 본다. 그런 하루를 보내면 침대에 누울 때 오늘도 정말 즐거웠어 소리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