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풍은 덜 들었어도 완연한 가을입니다. 초겨울 아닌가 싶게 쌀쌀했다가 반팔을 입지 않은 걸 후회할 만큼 덥기를 반복하고,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쨍한 공기에 “나오길 잘했다”는 말이 절로 나오고, 나도 모르게 아이스아메리카노 대신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게 되는 계절. 이제 봄과 가을은 너무 짧아서 그 자체로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기 위한 거대한 환절기처럼 느껴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고 그 다음은 여름이라 이런 변화에 슬며시 추악한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변화를 불러온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닥친 코앞의 재앙이지만…)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환절기라고 하고 환절기는 보통 좋은 말과 붙는 적이 없는 단어입니다. 환절기 비염, 환절기 감기몸살, 환절기 춘곤증, 환절기 우울, 졸려도 잠이 안 와도 아파도 콧물이 나도 우린 다 환절기 탓을 해요. 몸이 급격한 온도 변화에 적응하느라 면역력이 떨어지고 그래서 아픈 거라던데, 계절이 바뀔 땐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그 변화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무리합니다. 일단 계절이 바뀐다 싶으면 빠르게 떠오르는 것들이 너무 많죠. 작은 인간의 작은 정신으로는 다 따라잡기도 힘들 만큼.
우선 날이 추워지면 지나온 모든 가을학기가 한번에 떠오릅니다. 맑고 쨍한 목소리의 노래들이 떠오르고 가을 밤 축제에서 듣던 밴드,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뼛속으로 파고들던 인문대 강의실의 냉기, 무엇보다 라디에이터 돌아가는 따다다다다 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건즈앤로지즈와 브로콜리너마저, 달빛요정만루홈런과 검정치마 노래를 들으면서 이제는 저를 떠나간 불안과 우울을 살짝 맛보는 것도 조금 찔리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또 코끝이 조금이라도 시렵다 싶으면 냅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죠. 바로 기름진 생선의 맛입니다… 전어로 시작해서 전갱이 도루묵 고등어를 거쳐 방어와 각종 조개 국물들로 이어지는 코스를 한 바퀴 쭉 돌면 어느새 다음 해로 넘어가 있고 겨울 한복판에서 술독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냥 술 먹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름엔 맥주나 화이트와인이 맛있지만 사실 그건 어쩌면 구색을 맞추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술맛은 바람이 차지는 때부터가 진짜입니다. 오늘은 약간 가을의 쓸쓸함과… 뭐 그런 이야기를 분위기 잡고 해보려고 했는데 술 이야기 나오는 순간 오타쿠 특: 벅차오름 나타나고 말았네요. 별 수 없죠.
다시 돌아가서, 가을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오로지 나의 것입니다. 이보다 개인적일 수 없는 기억들이 가득해요. 그게 없이는 겨울을 맞이할 수 없다는 듯, 더 추워지기 전에 이것들을 두르고 팔을 꿰어 넣으라는 듯 급하게 쏟아지느라 정신에 부하를 거는 수많은 기억. 가을을 넘어 겨울밤이 오면 그때의 아늑함은 오로지 혼자만의 것이기에 가을은 혼자가 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반면 여름의 기억은 남의 것처럼 옵니다. 여럿과 어울렸던 기억, 다같이 바다에서 깔깔 웃던 소리, 얼음이 잘그락대는 버킷에서 끄집어올리는 와인병, 끈적일 틈도 없이 뚝뚝 떨어지는 땀 같은 건 아무리 떠올려도 곁에 누군가 함께죠.
비가 오면 생각나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정작 비 오는 날 몇 번이나 만난 사람일까요? 백 번의 만남 중 딱 하루만 비가 왔대도 그날이 가을이었다면 저 노래의 모든 단어를 믿을 수 있습니다. 코 끝이 차갑게 식는 계절은 그런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언제나 가을을 사랑하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조급하게 느껴집니다. 개천절이, 추석이 다가오면 ‘단군이 사기 당한 날씨’ ‘트렌치코트랑 가죽자켓을 입을 수 있는 단 일주일’ 이라며 수선을 떨고 이 축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렇게 아끼고 아쉬워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어요. 이런 법석도 우리가 가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한껏 숨을 들이마시게 됩니다. 시원하지만 차갑지는 않은, 콧속을 찢을 것 같이 고통스럽진 않지만 제법 상쾌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 아까운 사람처럼.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나 ‘있을 때 잘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가을은 공평하게 매년 돌아오니 기쁘게 맞이해야죠. 일단 저부터,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는 둥 배부른 소리는 그만 하고 온통 가득한 가을을 즐겨야겠습니다. 재촉하지 않아도 가을은 가고 길고 긴 겨울이 올 테니까요. 어느 날 집을 나섰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날 그제야 가버린 가을을 아까워하면 때는 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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