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레터를 읽고 있는 분이라면 최소한 책을 싫어하지는 않으시겠죠. 이렇게 시시콜콜한 글을 읽는다는 건 책을 읽는 것보다 가벼운 마음으로도 가능하지만 또 그에 지지 않는 크기의 관심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밀도는 다를지 몰라도 부피는 같은 일, 그리고 저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밀도를 높이는 것보다 부피를 키우는 일이 더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한 달에 100권 정도의 책을 들춰보고 바쁘지 않을 땐 일주일에 한두 권의 책을 읽으니까요. 하지만 어린 시절 저는 책에 집착했습니다. 차고 넘치게 많고 그만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대부분 책 읽기에 썼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책을 놓아야 하는 시간까지 책 읽는 데 썼어요.
밤에 몰래 손전등을 켜고 읽었던 <스물네 개의 눈동자>보다 재미있는 게 세상에 있을까요? 가뜩이나 입도 짧은데 밥상에서는 책을 못 읽게 하니 두 숟가락 먹고 다 먹었다고 냅다 도망치는 어린이… 육아 난이도 제법 높았겠죠. 결국 ‘밥상에서 책 금지’ 조항은 사라졌고 저는 밥 한 그릇을 먹는 동안 책 한 권을 다… 아니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차 안에서 멀미가 심하게 났는데요. 그럴 땐 눈을 감고 쉬거나 차창 밖으로 먼 곳을 응시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저는 책 속 이야기로 도피하기를 결정했고 잘못된 선택의 당연한 결과(=🤮)로 그 책은 어느 고속도로 갓길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아르센 뤼팽 전집 중 한 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책 위에 토해버리기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불러온 적은 없었지만(그래서일까요?) 책으로 도피하는 건 항상 너무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이 버릇은 정말 여든까지 갈 셈인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거나 생각할 게 있거나 마음이 안 좋을 땐 책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심지어 아주 옛날에 읽었던 책으로 도망쳐요. 비문학보다는 문학을, 에세이보다는 소설을 좋아하는 취향도 이 버릇을 떼어내지 못하게 하고요.
처음으로 사랑했던 책이 뭐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치고는 아주 어두웠던 노원평생학습관, 그 안에서도 더 컴컴했던 어린이 열람실에서 <모모>와 <소피의 세계>를 만나고 <나니아 연대기>를 두 권씩 빌려 읽던 기억만은 생생합니다. 그리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쓰고 일론 비클란드가 그린 동화책을 아주 좋아했어요. <산적의 딸 로냐> <사자왕 형제>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 같은 책들이요. <백두산 전래동화>에도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아직까지도 뭘 하든 ‘석달 열흘’은 해봐야 안다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