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PD와 건축가와 긴급구호요원(???)을 거쳐 고등학생이 된 뒤로는 3년 내내 장래희망란에 기자를 적어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여기에 적어내는 ‘직업’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계적으로 휘갈겨냈겠죠. 왜 이렇게 확신하느냐면 이때의 진짜 꿈은 ‘(무슨 글이 됐든) 글 써서 먹고살기’였다는 게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저건 또 어떻게 기억하느냐면 대학 때 ‘글 써서 먹고살기는 폐기하고 글 만져서 먹고살기로 선회한다’고 결심했던 게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이루어져서 출판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꿈이⭐이루어진 후는 어땠냐면요. 대부분의 꿈이 그렇듯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런 거였다니 하는 절망과 현타의 시간도 있었지만 또 어떤 꿈들이 그렇듯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바랐던 일을 실제로 하게 되었다는 성취감, 희망을 현실로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실제 그 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컸던 것 같기도 해요. 모든 일은 얼마간의 ‘뽕맛’ 없이 굴리기 어렵지 않던가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I love my job*3”은 그 찰나의 뽕맛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겠고요. 지금은 편집자로 일하지 않고 글을 만져 먹고 살지도 않지만 종종 그 시간들을 떠올립니다. 글로 돈을 벌고 싶었다가, 글 만지는 일로 먹고살고 싶었다가, 결국 그 일을 하게 된 날들. 약 10년에 걸쳐 흘렀던 시간이 제법 행복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이나 과학자나 대통령, 하다못해 변호사 같은 꿈을 한번쯤 꿔봤을 법도 한데 제가 꿈꿨던 가장 거창한(?) 직업은, 글쎄요. 기자나 PD가 조금 멋쟁이 같기는 하지만 사실 그땐 기자도 뭔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 90년대 신문기자를 상상했던 거고 군인도 그냥 개구리 군복 입고 철조망 아래를 박박 기는 모습을 상상했던 거라서요. PD도 자기가 경찰인 줄 아나, 하는 욕을 들어먹으면서 승합차에서 노숙하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머리 하나로 질끈 묶고 냄새나는 체크 셔츠 입은 그런 거 아시죠. 한번도 간지나고 세련되고 멋진 직업인의 이미지를 떠올린 적이 없네요. 이게 다 어릴 때 키자니아가 없었어서 그렇다.
치열하고 더럽고(?) 몸이 힘들고 활동적이고 바쁘게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막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그런 거요. 그에 비하면 실제로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고상하고 몸 편하고 농땡이도 칠 수 있는 일이군요.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게으른 천성에 맞지 않는 꿈을 좇았던 건지, 저런 치열함은 어떤 자격을 증명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이것도 속 편한 이야기긴 합니다. 결국 이 일과 인생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애초에 꼭 이루고 싶은 어떤 미래란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선명한 고화질로 그걸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쭉, 저는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일에 약합니다. 공상, 상상 이런 거 못했고 안 했고 지금도 그래요. 10년 뒤 20년 뒤 제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냐고요? 그냥… 지금하고 비슷하겠죠 뭐. 시발시발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고는 하하 웃고 주말에는 드러누워 있다가 놀러도 나가고 인생 좋네 이 정도면 과분하게 행복하네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밝으면 다시 시발시발 시작) 이런 삶의 단점은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는 겁니다. 이게 왜 단점이냐 하겠지만 진짜 단점 맞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한국 사회(^^;)는 놀랍도록 풍요롭습니다. 물론 이 풍요가 어떻게 분배되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이 중에서도 제가 속한 세대의 일부는 매우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고 아무리 소박한 꿈을 꾼다고 해도 그건 한 인간에게 매우 행복한 환경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자꾸 니가 원하는 게 뭐냐 하고 싶은 거 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없다고 하면 야망이 의지가 열정이 없다고 뭐라고 하고요. 이것 참 서로 배부른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배부른 소리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양이 우습기도 하고 어딘지 처량하기도 합니다.
만약 아직도 매년 장래희망을 적어내야 한다면 저는 뭐라고 적을까요? 진짜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당장 이직을 하라고 해도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를 모르겠는데요… 뒤통수만 벅벅 긁을 뿐… 몇년 전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고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인 것 같다고요. 그 리즈 시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 꿈이 있다면… 이 시간이 계속 되길! 어린 시절의 제가 알았다면 제법 멋지고 부러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