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이나 MBTI, 사주팔자(?)처럼 결과가 정해져 있는 분류들은 정말 대화를 시작하는 용도로만 써먹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지 허술하고, 내가 원하는-내가 본 상대의 모습을 덧씌울 수 있는 분류가 더 웃기잖아요. 한 사람을 놓고 “##이는 당연히 후플푸프지”, “아닌데? 그리핀도르도 있는데?”, “케드릭(아무래도 세드릭은 입에 안 붙죠) 디고리도 후플푸프 거든요?” 하는 재미는 절대 놓칠 수가 없습니다. “제 MBTI요? INTJ요.” 이건 여기서 끝이잖아요. 너무 우기나요? 해리포터에 집착하는 MBTI 유형도 따로 있나요?
사실 이런 분류법은 다 일종의 불안 억제책일 겁니다. 내 앞의 이 사람이 궁금하고 무섭고 모르겠을 때, 이런 유형이니까 이런 사람이겠지 이런 행동과 말을 하겠지 예상하고 안심하기 위한 수단이요. 또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얼마간의 안심을 주잖아요. 한 사람이라는 세계를 탐험할 때 그 세계가 완전히 미지인 것보다는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여러모로 편할 거고요. 그 밑그림이 오히려 내 눈을 가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개인의 역량에 맡기겠습니다.
요즘엔 MBTI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많이 쓰이던데 그것도 미움 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을 억제해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머쓱하게 “나 I라서…(수줍게 웃기)” “T라서 공감을 잘 못해요(짜증나는 표정)” 이런 말들을 하는 것도 인간의 귀여운 점 하나인 것 같아요.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거요.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고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이런 각종 성격 유형 검사보다 더 해로운 건 실제로 오랜 관계를 지속한 사람들 사이의 오만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거고/해야 하고, 나와 너의 관계는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오만은 언제나 참 위험하죠. 요즘은 이런 캐릭터까지도 특정 성격장애의 이름을 붙여 유형화하는 게 유행인 것 같지만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라벨링을 좋아하는 걸까요? 갑자기 또 인간 싫어의 굴레에 빠지려고 하네요.
휴일에 <공룡의 이동경로>라는 소설집을 읽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참 잘 알고 있더라고요. 너무 명확하게 설명해줘서 저는 그 인물들을 상상할 필요조차 없이 가깝게 느꼈습니다. 실제로 너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인 것 같아서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주희 MBTI 뭘 것 같아?”라고 물으면 대부분 같은 답을 내놓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에 깜짝 놀라서 그만 구구절절 성격 유형 분류법 이야기를 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최근 안온 다정 무난 따뜻한 한국 소설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보다 시니컬해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뿔이 세 개나 있는 트리케라톱스라니 너무 귀엽잖아요. 인간은 역시 귀엽고, 귀여운 걸 좋아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제 이틀만 더 힘을 내면 주말이에요. 일하다가, 공부하다가 지치고 심심하면 MBTI랑 사주를 결합한 사업 아이템 한번씩 고민해보세요.(집착 레전드) 혹시 알아요? 대박나서 오늘을 곱씹게 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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