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은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의 짧은 튀르키예(라고 제 손으로 처음 써봐요) 여행을 추억하는 영화입니다. 쨍한 태양 아래에서 바다는 빛나고 부녀는 행복하지만, 그 행복 아래 깔린 잔잔한 우울함과 불안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예견된 이별에 대한 상실감과 고독이 투명도 70%로 잔잔하게 올라와요.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아래에 이 영상을 당장 꺼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던 것처럼요.
아무리 뜨겁고 맑고 솔직한 해가 떠도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밤은 찾아옵니다. 그럼 그때부턴 ‘애프터 썬’의 시간이 시작되죠. 아무리 단단히 썬스크린을 발랐어도 오키나와나 튀르키예의 햇살 아래 잠시만 서 있어보면 저녁 땐 따끔거리는 어깨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엔 숙소 수영장에서 딱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했는데 어깨에 수영복 끈 자국이 남았더라고요. 이 자국은 또 최소 반 년을 가겠죠.
알로에를 바르든 화상연고를 바르든 애프터썬의 시간은 얼마간의 후회를 남깁니다. 마치 진탕 술을 먹은 다음날처럼요. 분명 어제는 너무 즐거웠는데 지금의 숙취와 고요함과 약간의 두통이 약간의 짜증을 유발하는 그런 기분입니다. <애프터썬>은 우리가 상실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우리의 시간이 솔직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졌던 때를 쫙 펼쳐 보이고, 꼭 그런 시간과 추억들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예쁘잖아요. 어쩌면 그 시간들을 외면하고 싶어서 해가 들지 않는 곳에 처박아두는 것까지가 애프터썬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키나와는 회사 동료들하고 짧게 다녀온 거라 큰 기대가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늘 그렇듯 막상 가니까 너무 재밌어서 신나게 다녀왔죠. 이번 여행은 개인적으로 일종의 애프터썬이었는데요. 와장창 한번에 까먹고 싶은 일들을 햇빛 아래 펼쳐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스스로의 못난 모습도, 내가 잘못한 일과 후회되는 순간들도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었어요. 이 정도면 햇빛 본 뱀파이어처럼 구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그건 그냥 죽는 거던가…
어쨌든 여행은 끝났고,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고, 애프터썬의 시간도 끝입니다. 다시 뜨거운 태양 아래에 서기 전까지 애프터썬의 시간은 오지 않겠죠. 저는 가끔 어깨에 남은 탄 자국을 볼 때마다 이번 여행을 떠올릴 테고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은 인화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국이 흐려지면서 같이 사라지는 추억이기를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