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참 안 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상황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 누군가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느낌을 잘 받지 않거든요. (물론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을 걸어야 한다거나, 자려고 누웠는데 현관문 밖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날 때는 별 수 없이 머리털이 쭈뼛 서지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닥칠 기미가 보이면 있는 힘껏 거기에서 벗어나고, 최소한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또 살면서 누군가 저를 위협한 적-위협하는 데 성공한 적-은 많지 않아요. 대부분은 ‘니가 뭔데 나를 위협할 수 있겠냐’는 오만한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 잘난 맛에 산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어요…
또 어느 정도는 유전의 영향도 있습니다. 가족이 다 비슷한 성격이에요. 여간한 일은 그저 성실로 돌파하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고, 작은 일에도 잘 기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가친척 중 제가 제일 지독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족들은 늘 저의 성취를 칭찬하고 감탄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술을 권합니다. 수능 성적이 생각한 만큼 안 나와서 이걸 어쩌나 하고 있을 때, 엄마는 술 한 잔 안 먹어보고 대학에 입학하는 게 더 큰일이라는 표정으로 빨리 소주 먹어봐야 한다고 전전긍긍 했으니까요. 결국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마신 첫 소주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으니 역시 모든 걱정의 90퍼센트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들이네요.
어쨌든 현대인이 겪는 거의 모든 질병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스트레스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제법 큰 메리트입니다. 가만 있어도 나름 행복, 꽤 괜찮음, 대체로 행복함 상태니까 아무래도 살기 편하죠. 뭔가를 획득하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했을 때 크게 절망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실패가 두려워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전략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한번도 써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아, 나 어제 자는 바람에 공부 하나도 못했다. 한 마디로 타고 났다는 건데 이런 이야기 너무 재미 없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저도 제법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중간고사를 치는 꿈을 꿨어요. ‘아직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어떻게 시험을 치지? 어 근데 왜 시험을 치지…? 나 30대 아닌가? 나 대학도 졸업했는데? 휴우 이건 꿈이구나’ 라는 긴 과정을 거쳐 깨어났어요. 누운 채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나에게도 찾아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성시경(ㅋㅋ)이나 주위 친구들이 이런 꿈을 자주 꾼다고 할 때마다 아직 학생에서 못 벗어났냐고 놀렸는데… 반성합니다.
또 얼마 전에는 메일 제목을 반만 쓴 채로 메일을 보냈습니다. 잘 하지 않는 실수인데 저질러버렸네요? 심지어 그렇게 보낸 것도 몰랐어요. 메일을 본 친구가 니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힘들긴 힘든가보다며 알려줘서 알았습니다. 이러다 조만간 첨부 파일도 첨부 안 하고, (제목 없음) 메일을 보내고, 제 이름에 오타를 낸 채로 메일을 보내게 되겠죠.
그래도 할 만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프로젝트는 끝날 거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의 성과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니까요. 이렇게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게 저의 비법입니다. 통장에 20억이 들어 있으면 숨만 쉬어도 마음이 든든하고 한겨울에도 몸이 뜨끈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니 내가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 줘야죠. 언덕까진 못 되고 봉분 정도의 어쩌구지만 아무튼 저에게는 잠깐 비바람 피할 비빌 언덕이 있습니다. 이거 쌓고 다지느라 겁나 힘들었어요.
돌이켜보면 살면서 우울했던 시기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대학교 3-4학년, 그러니까 스물둘 스물셋 정도였겠네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게 어리지만 그땐 제가 다 늙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정신이 늙어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하고 신나게 술을 먹고 집에 돌아오면 벌써 새벽 두세 시인데, 그때부터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진짜 매일같이 그랬어요. 해가 뜨려고 할 때 잠들어서 다음날 오후에 일어나면 그때부터 쿠키런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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