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친구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늘 제일 친한 친구 무리가 있고 꼭 그 친구들이 아니더라도 같이 만화책방도 노래방도 가고 급식도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잔뜩 있고 같은 학년 대부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친구가 부족하거나 같이 놀 사람이 없는 어려움은 겪은 적 없는 셈이죠. (사실 중학교 2학년 1학기의 두 달 정도는 제일 친한 친구가 없는 시기였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릴 땐 거창한 ‘우정’ 같은 걸 말하는 게 어딘지 오그라들고 머쓱하고 유난이다 싶었는데 점점 우정이라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건 제 인생에서 친구라는 존재의 외연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에요. 대학을 거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습니다. 우선 나이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꼭 직접적으로 알게 된 사이가 아니어도, 그러니까 ‘건너건너’ 아는 사이여도 금세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새로운 친구가 나와 유사한 코어를 공유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었죠. 각자 인생의 경로를 어떤 모양과 방향으로 잡아갈지 어느 정도 정해둔 때니까요.
중고등학교 땐 다들 고만고만 비슷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는 에코-페미가 되었고 누구는 애 엄마가 되었고 누구는 사장님이 되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만난, 최소한의 코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서로 아주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코어를 공유하는 사람과 만나면 순식간에 친구가 되죠.
그래서일까요? 지금의 친구들과 20년, 30년 뒤 어떤 모습으로 어울리고 있을지 생각해보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어떤 친구들과는 언제 만나도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이 비속어를 뱉으며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겠고 어떤 친구들과는 최근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빠르게 공유하고 그동안의 수고와 기쁨을 한껏 치하하겠죠. 또 어떤 친구들과는 무던한 일상을 나누며 어려움을 수월하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힘껏 손을 내밀고 또 그 손을 잡을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면 이런 겁니다. 개인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공동 생활을 하게 되는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저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개인 시간’에 미쳐 있지만 또 어쩔 수 없는 독거의 짐을 나누어 들기 위해 얼마간의 공동 생활을 선택하는 그런 친구들이겠죠. 그들과 가끔씩 맞닿는 덤덤한 일상을 나누는 저를 상상합니다. 그러면서 가끔은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떠들어 댈 생각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제가 별로 해줄 말이 없는 이야기를 실컷 풀어내겠지만 에너지가 닿는 데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려고 노력하겠죠. 또 어떤 친구들은 십 대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테고 저는 십 대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리액션을 하고 말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 대처럼 웃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지금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을 지닌 친구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렇게 비슷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본인의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니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친구의 곡선이 저와 겹치는 날도 올 거예요. 우리는 서로의 삶을 돌보고 가끔은 질책하고 훨씬 자주 격려하면서 남은 인생을 메꾸어 나가겠죠.
제가 지금까지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앞으로 우정을 쌓을 친구들은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누군가와는 멀어지게 되겠죠. 그때 저는 크게 슬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들과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친구들과 행복하기 때문에… 이별의 고통은 아쉬움과 미련에서 온다고 믿거든요. 실제로 별 수 없이 멀어진 친구들을 떠올릴 때 마음엔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게 바로 소시오패스의 증거일까요? 조금 저항해보자면, 이제는 서로 겹쳐지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아름다운 우정 아닐까요? 비록 완료된 우정이라 하더라도요.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고 재미있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다는 생각이요. 내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같은 걸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박막례 할머니도 신계숙 교수님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에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친구가 없어서 심심할 일은 없겠구나.
행복에 필요한 것들이 뭘까를 생각해봅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건강, 또 내가 좋아하는 일, 나만의 공간, 개인 시간(소리를 꽥 질러도 별 수 없습니다 진절머리 나도록 중요하니까^^), 그리고 친구들이에요. 인생은 정말 예측불허죠. 저랑 비슷한 예측불허를 겪는 친구들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우리가 함께 할 미래의 시간들이 얼마나 우당탕탕 다채로울지 기대됩니다.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